중이 제 머리 못깎는다? 그게 무슨 뜻이지? 왜 그런 속담이 나왔을까? 신행생활을 하는데 명당자리 따로 있나?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은 자꾸만 의심하는 여우 같은 중생심을 버리라는데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한국의 불교신문 [www.buddhistnews.net]이 개화사 주지 송강 스님의 답변 겸 해설로 이런 물음표들을 풀어주고 있다. 100문100답 가운데 너무 익숙해서 답을 아는 듯하면서도 정작 답을 하려면 머리를 긁적이게 되는 알쏭달쏭 문답 5개를 골라 싣는다.
스님은 혼자 삭발하지 못하는가?
▷스님들은 스스로 머리를 깍지 못한다는 속담이 빈번히 사용되는데, 그 뜻은 무엇이며 또 바르게 쓰이는 것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출가는 홀로서기의 대표적 행위
불교를 폄하하려는 의도적 오류
◇질문한 속담은 아마도 스스로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문제를 철저하게 자신이 해결하는 것이 출가의 정신이기 때문에 아주 잘못된 비유이며, 속담으로 쓰일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위의 속담이 ‘스님들이 혼자서는 삭발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라면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스님들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삭발을 합니다. 안전면도기가 만들어져 있는 요즘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예전에도 여러 스님들과 함께 있지 않을 때는 혼자서 삭발을 했던 것입니다. 삭발의 시작은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왕궁을 떠난 싯다르타는 숲에 이르자 스스로 긴 머리카락을 잘라 따라왔던 시종에게 주며 자신의 출가를 왕궁에 알리라고 합니다. 이처럼 의지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삭발은 얼마든지 혼자서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혼자서 출가할 수 없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라면 더욱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님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출가는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어 출가하는 것이 아니며, 또 선택된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스스로가 결심하고 스스로 선택한 길이 출가이기 때문에, 출가야말로 완벽하게 혼자 결정할 문제입니다. 특히 모든 부모님들이 출가를 반대하는 우리의 정서에서는 혼자 결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체가 엄청난 반대에 부딪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정말로 흔들리지 않는 의지가 아니면 출가는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스승이 있어야 스님으로서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라 해도 잘못 사용된 예가 됩니다. 부처님은 스승이 하락해서 출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요즘의 제도로 보면 스승이 정해져야 수계를 할 수 있기는 하지만, 출가자로서의 기본요건만 되면 당연히 스승이 될 분은 정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경우에도 비유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이 속담이 갖는 뜻인 ‘자기 일은 자신이 해결하기 어렵다’고 하는 경우로 살펴본다면, 이 경우 완전히 불교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의 종교 가운데서 철저하게 의타적이지 않은 불교를 아주 의타적인 것처럼 생각하게끔 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시작인 석가모니부처님으로 돌아가 살펴보자면, 당시 수많은 신에 의존하는 분위기 속에서 부처님은 가히 혁명적인 가르침을 펼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스스로가 지어서 스스로가 받는 것이지 결코 신의 뜻에 의해서 조정되는 아니며, 따라서 어떤 문제라도 스스로가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결코 무능력하거나 나약한 것이 아니라 존귀한 존재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스님들은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출가를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갖춰진 보호체계인 집을 떠나고 가족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뿐만 아니라 산문을 들어설 때 이제까지 심혈을 기울여 배우고 익혔던 것들이 철저히 부정당합니다. 그야말로 갓난아이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로부터 스스로 서는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출가의 나이를 새로 따집니다. 대학자가 출가해도 행자(예비수행자)에서 시작하고, 수계를 하고 새 이름을 받으면서 한 살이 되는 것입니다. 최후의 경지에서는 존경하는 스승인 부처님께 의지하는 것마저도 버려야 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채식주의자셨나?
▷한국불교는 육식(肉食)을 금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채식주의자임을 뜻합니까?
부처님은 걸식으로 식사 해결
공양 때도 만 생명을 먼저 생각
◇불교를 처음 공부하는 이들이라면 출가자와 재가자가 모두 부처님은 채식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부처님은 채식주의자가 아닙니다. 채식주의자가 될 수도 없었지요. 부처님은 걸식(乞食)으로 식사를 해결했으며 제자들에게는 식사의 선택을 근본적으로 금하셨습니다. 그것은 밥을 얻을 때 집을 가리지 말고 차례대로 얻어야한다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각각의 집에서는 그들의 취향대로 음식을 만들 것이며, 평소에 자신들이 먹는 음식을 그대로 제공하기에 걸식으로 얻은 음식은 매양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
?부처님 당시의 수행자는 모두 걸식으로 식사를 해결했습니다. 부처님도 당연히 그 관행을 따랐지요. 걸식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수행에 집중하기 위함이며, 일반인들에게는 모든 수행자들이 정신적인 스승이 되므로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좋은 공덕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수행을 끝낸 부처님께서는 걸식하는 시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고민도 들어주고 가르침도 베풀었던 것입니다. 걸식하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떤 음식이든지 모두 감사할 따름이지요. 당시 수행자들의 식사는 취향에 따라 식당을 선택하는 오늘날의 여유로운 일반인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로 음식을 주문해두고 걸식하는 입장이 아닌 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러므로 채식만 하겠다는 채식주의자가 애당초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초기경전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깨끗한 마음으로 제공해준 음식은 청정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뜻은 음식에 대한 여러 가지 시비를 없애고 아울러 음식에 대한 집착도 끊는데 있을 것입니다. 수행자들에게는 음식이 수행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건강을 지켜주는 약입니다. 지금도 스님들의 공양 시간에는 우주에 가득한 각종 생명들에 대한 안위와 나눔 의식을 행하는데, 그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음식을 받고 보니, 수행이 부족한 나로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도를 이뤄 만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약으로 삼아 생명을 유지하려 한다.”
오래전에 세계의 불교지도자들이 교류도 하고 또한 공동의 관심사도 해결하기 위해 남방불교국가에서 모였을 때, 우리나라의 노스님들은 차려진 음식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합니다. 음식의 반 이상이 육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찌 부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육식을 왜 이렇게 많이 내놓았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남방의 스님들은 “부처님께서 언제 육식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까?”하고 되묻더라는 것입니다. 그 뒤 스리랑카 등의 남방불교와 우리나라 등의 북방불교의 계율을 비교해 보니 상당부분이 다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방경전을 통해 살펴본 바로는 부처님께서는 오히려 재가신자에게 육식을 금해야 할 경우를 말씀하셨는데, 가장 핵심은 살아 있는 생명을 직접 죽이거나 다른 이에게 죽이라고 시켜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재가의 신자는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살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살생을 피하기 위한 노력을 당부한 것입니다.?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핵심이 지혜와 자비입니다. 만 생명이 서로 존중되어질 때 이 땅이 정토가 됨을 아는 것이 지혜라면, 다른 생명을 나의 생명과 같이 이끼는 것이 자비입니다.
깨달아도 개인적 비통함이 있는가
▷참선의 중흥에 대해 토론하는 내용 중에, ‘경허선사(鏡虛禪師)께서도 도를 깨닫고 난 뒤에 의발(衣鉢)을 전할 사람이 없어 안타까워했었다’는 설명을 봤습니다. 그 내용이 옳다면 깨달은 분들도 무언가에 걸릴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정말로 경허선사와 같은 선지식도 자신의 의발을 전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것인지요?
깨침은 감정 넘어 툭 터진 세계
사사로운 비통함 가지지는 않아
◇경허선사의 오도가(悟道歌)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처음과 끝부분에 중복적으로 표현된 ‘사고무인 의발수전 의발수전 사고무인(四顧無人 衣鉢誰傳 衣鉢誰傳 四顧無人)’이라는 표현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구나. 의발을 누구에게 전할꼬? 의발을 누구에게 전할꼬?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구나”하는 내용입니다.
언어문자는 참 편리하기는 하지만 또한 갖가지 오해를 가장 많이 일으키는 것이며, 사전적인 해석의 틀에 갇히면 진실과 멀어지게 되기에 딱 알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이 전해졌다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전등(傳燈)을 설명할 때, 언어 밖의 도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삼처전심(三處傳心)을 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와만 통했다는 세 곳의 행위는 진실이고, 다른 모든 제자들과의 대화(經)는 거짓이었을까요? 꽃을 드신 부처님의 행위는 모든 제자들에게 평등하게 설하신 법문입니다.
‘말하지 않는 말씀’이었는데, 다른 제자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오직 가섭존자만 알고 미소로 답을 함으로써 ‘듣지 않는 들음’을 증명했습니다. 즉 부처님은 모두에게 평등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차등이 있어서, 오직 가섭만 부처님과 대화를 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든 것이 비밀이 아니라 다만 가섭만 그 법문을 들었을 뿐이듯이, 경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은 누구에게도 비밀이 없이 언제나 평등하게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그 말씀(經)을 듣는 후학들에게는 차등이 있어 정말로 부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이가 드문 것일 뿐입니다. 만약 부처님께 전해줄 마음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이미 모든 경전에 다 드러나 있을 것입니다. 경허선사는 제자들을 가르치던 뛰어난 강사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이 가르치던 그 모든 이론이 그림자 같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이윽고 깨닫게 되시고, 그때의 기쁨을 ‘오도가(悟道歌)’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첫 마디가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구나. 의발을 누구에게 전할꼬?”였습니다.
이 말은 결코 당신의 깨달음을 이을 제자가 없다는 뜻으로서의 ‘가사와 발우를 전할 사람이 없다’는 비통함이 아닙니다. ‘온 천지에 사람이랄 것도 없고, 법이랄 것도 없으며, 마음이랄 것도 없고, 부처랄 것도 없는데, 누가 의발을 전하고 누가 의발을 받을까 보냐!’하는 거침없는 일성(一聲)을 던진 것입니다. 경허선사는 직접 의발을 전해 받았기 때문에 깨달은 분이라고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경허선사에게는 당시 생존하신 ‘법 스승(法師)’이 없었습니다.
경허선사를 바로 만나지 못한 이가 착각하여 ‘깨달음의 노래’를 자기의 분별로‘제자 없어 비통해한 노래’인 것처럼 해석해 버리듯, 경을 통해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면 부처님을 진흙탕에 빠뜨리고, 어록을 통해 조사를 만나지 못하면 조사를 욕보이게 됩니다. 깨달은 이들은 결코 부질없는 것에 걸리지 아니하고, 선지식은 사사로운 비통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은 보는 사람의 어리석은 분별일 뿐입니다.
신행에 적합한 장소가 따로 있는가?
▷독경과 염불은 법당에서만 하라는 얘길 들었습니다. 집에서 불상을 모시거나 독경하면 재앙이 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절에 갈 형편이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신행(信行)을 하면 좋습니까?
신행은 삶 위한 숨쉬기와 같은 것
호흡에 때와 장소가 따로 있으랴
◇불교의 모든 신행은 깨닫기 위한 노력입니다. 일상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편안하고 행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떤 곳에서는 행복하고 어떤 곳에서는 불행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신행에 때와 장소를 가린다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사람으로서 어떤 곳에서는 스승으로 보고 어떤 곳에서는 재앙을 내리는 대상으로 본다면 결코 바른 불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상을 모시는 것은 스승을 항상 잊지 않고 생각하기 위함이며, 또한 스승의 삶을 따라가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환경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러므로 확실한 경지에 올라 어떤 곳에서도 흔들림 없이 신행(수행)할 수가 있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못하다면 환경이 잘 갖춰진 곳에서 공부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평소처럼 쉽게 몸가짐이 흐트러지기 쉽고 잡다한 방해조건이 많은 가정에서보다는 몸가짐을 조심해야하고 경건한 마음자세가 필수적이며 대체로 고요한 분위기인 법당이 기본적으로 좋은 환경이 될 것입니다. 신행은 숨쉬기와 같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가 없지요. 그러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신행(수행)을 해야 하겠지만, 공기가 탁한 곳에서보다는 맑은 숲속에서 숨 쉬는 것이 건강에 좋을 것은 당연하고, 또 공기가 희박한 고산보다는 평지가 숨쉬기에 한결 수월하겠지요.
그렇기는 하지만 집에 불상을 모신다거나 집에서 독경을 많이 하면 오히려 재앙이 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이며, 오히려 신행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기위한 의도적인 거짓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마치 공기가 다소 탁한 곳에서는 숨을 쉬지 말고 있다가 공기 좋은 숲에서만 숨을 쉬라는 것과 같이, 이치에 맞질 않는 억지입니다. 약간 탁한 공기를 호흡하는 것은 아주 맑은 공기를 호흡하는 것만큼의 효과가 없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숨을 쉬지 않아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방법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 중에는 의외로 비불교적인 헛소문에 흔들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지간히 교학을 연구했음에도 집에 불상을 모시고 예불하는 이가 드물고, 수십 년 신행을 한 이들도 집안의 큰일을 앞두고는 절에 가는 발길을 주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그렇게 하면 좋지 않다고 하더라’하는 막연한 낭설에 휘둘린 결과입니다. 그만큼 정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부족한 까닭입니다.
불상과 불경은 모두가 스스로를 살피는 거울입니다. 불상을 보면서 나도 부처님같이 깨달아야겠다고 각오를 새롭게 하는 것이며, 불경을 읽으면서 자신이 바르게 살고 있는지를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은 잠시도 쉴 수가 없는 중요한 공부입니다. 그러니 불상을 모시고 불경을 읽는 수행에 때와 장소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숨을 쉴 때 “특별한 곳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셔야 건강해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특별히 좋은 공기를 마신다기보다는 노이로제에 걸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행도 생각으로 분별하면 장애가 생기기 쉽습니다. 일상사처럼 신행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영험도량은 따로 있나요
▷기도를 하려면 영험 있는 도량에 가서 하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영험은 무엇이며 특별한 장소가 따로 있습니까?
기도하면 바람대로 뜻이 이루어지는 곳
공연장의 좋은 자리처럼 최상조건 자리
◇영험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질문에서 알고자 하는 것은 아마도‘불보살님께 올리는 기도를 통해 만나는 불가사의한 효험’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이것은 매우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체험이기에 자칫 오해를 살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목숨을 던질 각오로 기도해 본 사람이라면 매우 많은 신비한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험이란 것이 정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합당한 것인가 하는 것은 깊이 살필 문제입니다. 만약 그 영험이 깨달음으로 가는 사다리가 되고, 보살행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합당하다고 보겠지만, 그러한 체험을 통해 매번 신비한 체험에 삶을 의존하게 된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말하는 영험을 겪은 이들이 부처님의 정법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질문에서 말한 영험도량을 풀이해보면,‘기도를 하면 그 기도의 바람대로 뜻이 잘 성취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세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영험한 기도처’가 여러 곳 있으므로 ‘영험도량’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농사를 지어도 잘 되는 곳이 있듯이, 기도를 하면 만족도가 높은 곳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건일 뿐입니다.
만약 집에서 기도할 때에도 먼 길을 힘들게 찾아간 기도처에서처럼 잠도 자지 않고 일심으로 지극정성으로 기도할 수만 있다면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그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예전에 대단히 영험한 곳이었는데 근래에 좀 못한 것 같다고 입에 오르내리는 곳은 대개 예전에 비해 접근이 편해진 곳들이며 휴식공간도 마련된 곳입니다. 대개 힘들게 가는 곳은 힘든 만큼 그 각오가 강해지고 기도도 지성으로 합니다. 그러나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언제든지 올 수 있다는 생각으로 대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매우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한 사람과 예사로 기도한 사람에 따라 그 영험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시설이 좋다는 공연장의 가장 음향이 잘 들린다는 지점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향악단의 공연을 감상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조건으로 보면 ‘가장 영험한 자리’인 셈이었지요. 바로 옆에는 악기를 가지고 온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이 앉았습니다. 학생은 부모 덕분으로 그 좌석에 왔지만 음악 감상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습니다.
심지어 연주의 중간에도 부스럭거리기에 봤더니 문자 보내느라 전화기와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최상의 조건에 있었던 그날의 학생은 결국 시간 낭비만 했던 것이지요. 만약 가난한 한 학생이 그 공연의 감상을 간절히 원해서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비용을 마련하여 조건이 나쁜 구석자리에 앉아 기쁜 마음으로 감상을 했다면, 그에게는 그 구석자리가 가장 영험한 자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가 영험도량인 깨친 사람은 밖에서 의지할 것을 찾지 않으므로 밖의 영험도량이 따로 필요 없겠지만, 끝없이 밖에서 의지할 것을 찾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영험도량이라는 곳이 있는 듯이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식은 의지할 것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방편으로 눈높이의 도량을 만들어 놓고 그곳을 통해 모양 없는 영험도량인 마음을 깨닫게 합니다.
기복불교는 잘못인가
▷ 기복불교에 대한 비판적인 글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에 가게 되면 무언가를 빌게 됩니다. 부처님 전에서 복을 비는 행위가 잘못된 것인지요?
불교는 복을 빌기보다 짓도록 권장해
나아가 베풀고 생활화하도록 가르쳐
◇먼저 용어 사용이 잘못되었음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흔히 ‘기복불교(祈福佛敎)’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기복불교’라는 말을 풀이하면 ‘복을 비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될 것인데,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굳이 표현한다면 ‘불자들의 기복적 신행’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질문을 정리해 보면 “불자들의 기복적 신행은 잘못된 것인가?”라고 할 수 있겠지요. 비판의 의도는 충분히 인정할 수는 있지만 과연 그 비판의 내용을 비판자 자신이 체험해보고 하는지는 의심이 됩니다.
모든 종교와의 만남은 복을 비는 행위에서 비롯됩니다. ‘복’이란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바라는 것을 소원으로 빌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무종교인이라 할지라도 복을 비는 행위는 어떤 방식으로든 하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복’이라는 것을 물질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고 정신적인 차원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정신적인 경우라면 수행자나 철학자나 예술가까지도 처음 시작은 복을 바라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복을 바라고 누군가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만을 한없이 되풀이하는 것이 어리석음임을 알게 되는 것은 시간이 흐른 뒤의 일입니다. 그 다음은 지도자의 인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차원이 달라졌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일이 아닙니다. 한 법당에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가 같은 경지라고 본다면 큰 착각입니다. 애타도록 가피력을 바라고 기도하는 초심자도 있고 반면에 염불삼매에 들어있는 이도 있지만, 이러한 차별은 일반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닙니다.
흔히 기복적인 신행을 비판할 때 다른 종교는 그렇지 않은데 불교만 그렇다는 식의 논리를 펴는데, 이것은 착각입니다. 오늘날 공인된 대부분의 종교는 복을 줄 신(神)을 설정해 두고 있습니다. 또한 복을 비는 신앙을 권장하고 있고, 혹 어떤 종교는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복을 바라는 심리를 철저히 이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복을 비는 행위에서 복을 짓는 행위로 가라하고, 다시 복을 베푸는 행위를 권하며, 이윽고 생활화가 되면 복을 놓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신앙이 아닌 신행을 강조합니다. 운동이 부족해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 산행(山行)이 가슴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몸에 좋은 산삼을 캘 수 있다거나 귀한 약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산에 갈 생각을 내게 됩니다. 구하려는 대상이 자신에게 절실할 때는 무작정 산에 갈 것이며, 처음에는 구하는 물건만 찾으려 애를 쓰겠지만 점차 산행 자체가 좋다는 것을 느끼게 되겠지요. 스스로 산을 좋아하게 되면 산삼이나 송이가 없어도 산에 갈 것이고, 이윽고 건강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바람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바람은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바른 바람을 설정하는 발원(發願)이 필요한 것이고, 그 발원에 따라 노력하는 정진(精進)이 필요한 것이며, 이윽고 깨닫고 나면 다시는 바람이 없는 무원(無願)의 세계가 됩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