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TV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금강산에 놀러갔던 남한의 관광객이 이북 초병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해금강 바닷가에서 새벽 5시쯤 당한 참변이었다.
“아차, 그랬구나. 잘못하면 내게도 생길 수 있었던 일이었구나!” 싶었다.
실은 꼭 한 달 전 나도 그곳 금강산에 갔었다. 젊은 친지들이 가자고 끌어서 관광을 떠났는데 지척간의 우리 땅에 들어가기가 50여년 전 외국을 방문했을 때보다 까다로웠다. 한국 쪽에서의 출국심사, 이북에서의 입국심사, 소지품 검사 등. 어떤 것은 금지품목이어서 검사대에 맡기고 가야했다.
아침 9시경 서울을 출발해서 남북 경계선상의 고진포에 도착한 것은 하오 1시. 입국수속을 끝내고 금강산 입산은 한나절에 끝났다. 4시 좀 지나 숙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옥류장에서 점심 식사를 할 때였다. 갑자기 식당 안이 술렁대 사람들을 따라 베란다로 나가 보았다. 밖을 내다보니 길가에서 열 살 가량의 어린이들이 인민군 두 사람에게 붙잡혀 훈시를 듣고 있었다. 식사 후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무슨 경계선을 넘었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줄을 좀 넘었기로서니, 그것도 식당 뒷길의 줄을 넘었다한들 뭐 그리 큰일인가” -나뿐 아니라 식당에 있던 수십 명의 관광객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한데 후에 알아보니 그 아이들은 세 시간이 넘게 억류되었고 부모들까지 가서 옥신각신 했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은 금강산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호텔 앞 길 건너편에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같이 서 있는, 높이가 20미터나 되어 보이는 큰 초상화가 세워져 있었다. 전 날 지나가면서 유심히 보아 두었던 터라 뒷주머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막 줄을 긋기 시작했다. 그때 멋없이 꼭대기를 곤두세운 군모 차림의 병사가 다가왔다.
“이거 뭘 하는 거요?” “스케치요” 내가 대답했다.
“한데 이거 종이가 왜 이렇소?”
“이런 종이에 대충 그려 가서 후에 잘 그리는 거요”
“후에 잘 그린다? 그렇지만 수령님과 위원장님을 이런 종이에다 그려요? 그건 안 됩니다. 그분들을 그림에 담으려면 더 크고 훌륭한 종이에 해야지. 이건 안 됩니다”
스케치하기 좋은 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서 나는 후에 크게 그리고 존경스럽게 그릴 것이라는 점을 되풀이 강조했다. 하지만 30세 가량의 깡마른 청년 하사는 요지부동이었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세요” 하더니 자리를 비웠다. 이윽고 그가 검은 신사복 같은 제복으로 쪽 뺀 상관을 데리고 왔다. 그 상관이 내게 다가오면서 소리를 질렀다.
“안됩니다, 안됩니다!”
나는 그에게 내 주장을 한번더 펼쳐 보았지만 마이동풍이었다.
상관이 간 후 나는 그 병사와 얼마간 대화를 가졌다. 내가 어떻게 미국인 방문명찰을 달고 있느냐, 미국 생활은 어떠냐, 특히 한인들의 생활은 어떠냐는 등 호기심이 적지 않다.
대충 대답해준 후 최근에 만났던 무역업자 친구의 말이 생각이 나서 전해주었다.
“최고위급 수준에서는 어떤 합의를 봐서 금년 내에 남북관계가 통일의 방향으로 큰 진전을 볼 것이라고 하더라”고 했더니 그 인민군 하사는 “정말 그래요!” 하며 펄쩍 뛰듯 좋아했다.
놀란 것은 오히려 나였다. 인민 공화국 체제의 표본 분자 같던 병사가 어떻게 이렇게 돌변할 수 있을까 싶었다. 나는 “동무, 다시 보자구!” 하며 이별의 악수까지 하고 그와 헤어졌다. 하지만 몇 발자국을 내딛는 순간 한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야말로 동상이몽이었던 것이었다. 나는 갈라졌던 가족들이 상봉해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낼 광경을 머릿속에 그렸고, 인민군 하사는 필시 ‘위대한 공화국의 무력통일’을 머릿속에 그렸을 것이었다.
이북관광이 계속되는 한 이번의 피살사건 같은 불상사는 재발할 것이다.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정원훈
전 은행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