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미주본사(LA)에서 일할 때 한 자영업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로서리 가게 바닥에 물이 엎질러져 걸레질을 한 후 ‘주의! 미끄러움’이라는 경고판을 세워놨는데도 흑인 여성고객 한명이 미끄러졌다며 치료비를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자기 혼자만 (자의적으로) 넘어지고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억울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해자’의 주장은 들어보나마나 뻔했다. 경고판과 관계없이 사고는 ‘본의 아니게’ 일어날 수 있고, 그런 사고에 대비해 업주들이 보험에 드는 것이므로 자신이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오히려 업주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고 반박했을 것이다. 하여튼, 한인업주의 ‘억울한 사연’은 본보에 기사화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엔 양면성이 있다. 요즘 워싱턴주에서도 추진되고 있는 존엄사 합법화 움직임이 좋은 예다. 불치병 말기환자들이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도록 의사의 도움(극약처방)을 받아야 한다는 쪽과, 안락사는 엄연한 살인행위이므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쪽이 팽팽히 맞선다. 수십년 이어지는 낙태자유화 논란도 마찬가지다. 산모의 건강과 태아의 생명 중 어느 쪽이 우선이냐가 쟁점이다. 양쪽의 도덕관, 윤리관, 종교적 신념 등이 달라 피차 수용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영원히 계속할 수밖에 없다.
요즘 본국신문도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시끄럽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가 기록물(컴퓨터 하드디스크 원본)을 퇴임하면서 고향인 봉하 마을로 유출했다고 청와대가 발표하자 노 전 대통령 측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청와대 측이 구체적인 증거를 댔지만 노 전 대통령 측은 원본이 아니라 사본이며 유출이 아니라 전직 대통령의 국정자료 열람권 행사라고 반박했다. 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지 참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그런데, 변명의 여지없이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있다. 필자는 엊그제 한 장기 애독자로부터 충정어린 고언을 들었다. 지난 3일자 본보 1면에 게재된 사진의 설명문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지적이었다. ‘이글(Eagle)’인 배 이름이 ‘이클’로 오기된 것은 차치하고 미 해양대학 사관생도들의 세계 순회훈련용 범선인 이 배가 마치 서부해안 경비를 책임진 해안경비대 소속 현역 함정으로 둔갑했다고 꼬집었다. 필자는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은 원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밥 먹듯 한다. 대표적인 예가 “문 닫고 들어와라(혹은 나가라)”이다. 영어로 번역하면 “Close the door, and come in이다. 세상에 귀신 말고 닫힌 방문을 자유자재로 통과하는 사람은 한국인뿐이다. 지극히 비논리적인 그 말이 한국에선 아무렇지 않게 통한다. 문을 닫은 후에 문을 부수고 방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의 극치가 지금 서울거리를 휘두르고 있다. 미국산 수입 쇠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린다는 헛소리이다. 지난 30년간 미국사람 못지않게 쇠고기를 많이 먹은 필자는 그 말을 듣고 처음엔 웃었다. 하지만 그 뒤 세종로 통을 꽉 메운 수십만명의 촛불시위대가 광우병 쇠고기도 안 먹고 광기를 발하는 모습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시위의 본색이 반미 또는 반 이명박 정부임을 감안하더라도 두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촛불시위 사태는 한국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잘 통하는지 여실히 입증한다.
하긴, 갈릴레오의 지동설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진리로 판명될 수도 있다. 한국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쏟아지면 좋겠다. 일본을 능가하는 경제대국이 된다거나, 김정일 체제가 붕괴돼 남북 평화통일이 곧 실현된다는 따위이다. 그러나, 다음 달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이 종합 4위에 오른다는 말은 아무래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일 것 같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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