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때’ 라는 것이 있다. 어려서부터 남들과 비슷한 시기에 걸음마를 시작해야 하고, 말을 해야 하고 밥도 제 때 찾아 먹어야 한다.
자라서는 남들과 비슷한 나이에 짝을 찾아야지 안 그러면 그 때를 놓쳤다고 아우성이다. 지금은 20대이건 30대 후반이건 자기 좋을 때 하면 되는 때가 되었지만 내가 자랄 때는 모두 20대 초에 결혼을 했다.
나는 어물쩡하다가 30대를 훨씬 넘겼으니 그 때라는 것을 놓쳐 버린 지도 까마득한 노처녀 중에서도 으뜸 이었다. (시집)가자는 사람도 없는데 결혼을 하고 싶다고 혼자 할 수도 없는 일이지 않은가. 눈 씻고 보려 해도 이 세상의 총각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았고 남들은 모두 그 짝이란 것을 찾아
행복해 보였다. 나는 그저 심난하고 의욕도없이 허송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해 휴가 때 이탈리아 로마 여행 중 뉴욕에서 알던 부루나라는 여자 집에 묵게 되었다. 닭고기에 로즈마리라는 향긋한 허브를 뿌려서 구우면 누릿한 냄새가 안 나고 맛이 있는 것을 그 때 배웠다.
스파게티에 마늘과 토마토 밖에 넣은 게 없는데 왜 그리 맛이 있는지 영문을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맛있는 올리브 기름 때문이었다.
오븐에 구운 붉고 푸른 피망도 그 때는 그저 좋아하며 먹을 줄만 알았다. 이 느끼하지 않은 이탈리아 음식은 내 비위에 꼭 맞는 한국요리 다음으로 제일 맛있는 음식이었다.하루는 그녀를 따라 외교관들이 많이 모이는 파티에 가게 되었다. 참, 파티라고 하면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는 여자들이 멋진 긴 옷을 입은 것만 생각 하면 안된다.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그저 불루진이나 입고 몇 사람이 모여 술이나 주스를 마셔도 파티고(그건 칵테일 파티라고 부른다) 대 여섯 명을 초대해서 저녁을 같이 먹으면 그건 디너 파티이다.
우리말의 모임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미국에서는 파티라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입고 나타난다. 나는 때로 초대장을 보낼 때 ‘노 불루진’이라고 쓰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의례 자기를 정성 들여 가꾸기 때문에 모두들 단정하게 차리고 나타납니다. 주부가 얼마나 애를 써서 준비 하는가를 조금 더 생각해 주는 것이다.그건 그렇고, 다시 그 외교관들의 파티 얘기로 돌아가겠다. 거기서 몇 사람들과 얘기가 잘 통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눴고 파티가 끝난 후에도 여럿이 우루루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그 후부터 거기서 며칠 묵는 동안 거의 매일 이 나라 저 나라 공관의 파티에 초대되어 가거나 함께 저녁을 먹으러 다니며 재미나게 시간을 보냈다.
미국 사람들은 별로 그렇지 않은데 유럽 사람들이나 남미 사람들은 그룹에 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았다. 그 중의 한 사람 에도아르도 사엔즈 라는 콜롬비아 사람이 저에게 뉴욕에 가면 자기 친구를 꼬옥 만나 보라고 소개 하였다. 그저 여러 번 그룹으로 놀러 다닌 사람인 것뿐인데 그렇게 자기 친구를 소개한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 하고 두고두고 생각했다.
알폰소라는 그의 친구는 콜롬비아대학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그가 나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자들은 진정하라. 그 사람은 아주 챠밍한 베네주엘라 여자와 결혼한사람이었고 저를 그냥 알고 지내도록 소개 한 것이다.
그는 할아버지 뿐 아니라 아버지도 남미 콜롬비아의 대통령을 지낸 집에서 태어났다. 유럽에서 비즈니스를 공부하는데 가장 유명한 대학인 파리 근교의 인씨아드에서 공부를 했다. 사람이 좋아서인지 아는 사람이 말 할 수도 없이 많았다. 저는 정말 지금까지도 세상에서 발이 그렇게 넓은 사람은 처음 봤다. 알폰소는 부인과 참 다정한 사이였고 그러면서도 독신이고 빈털털이인 나에게 정말 사심없이 대해 주었다. 공짜가 없는 세상에 그렇게 순수하게 대해 준 그를 나는 지금까지도 너무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부인이 없을 때 단 한 번도 알폰소와 둘이서만 저녁을 먹거나 차를 마신 적이 없었으니 참 그는 부인에게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구식이라고 생각하는가?
항상 나에게 이 모임에 와라 저 모임에 와라 하고 초대해 주었다. 드디어 나는 서양 사람들 중에서도 교육을 제대로 받고 상당한 직위를 가진 사람들이나 굉장한 갑부들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 외교관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누구를 아는가가 그렇게나 중요하다.
드디어 우울한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고 내 표정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동작에도 활기가 생겼다. 한 모임에서 아는 사람들이 생기면 거기서 또 다른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그 덕분에 파크 애브뉴나 매디슨 애브뉴의 멋진 아파트에서 요리사가 서브하는 디너 파티, 5번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내려다 보이는 넓직한 아파트의 부페 파티도 있었다.
꽤 많은 손님을 초대했는데 테이블에 놓인 메인 코스로 그 비싼 필레 미뇽(안심) 익힌 것을 잘라서 차게 서브 한 것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방마다 실내 장식가가 어루만져 잡지에 소개할 만한 곳이 대부분이었고 정장을 한 웨이터들이 오도브르를 서브하는 멋진 칵테일 파티도 수도 없이 다녀 보았다. 어떤 때는 아파트가 너무 좋은데 파티를 연 사람들은 젊어 그것이 부모의 집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돈 많은 집의 아이들이라 생각했다. 저는 그저 겨우 집세 내고 매달 조금씩 모아 일 년에 한 번 씩 휴가 가는 게 고작이었으니 그런 것을 보면 별 세상이었다.
뉴욕에는 정말 돈 많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70년대에 유명했던 올림픽 타워의 전망이 기막힌 집 구경뿐 아니라 박물관에서나 보는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걸어 놓고 사는 사람들도(글쎄 말이다. 그게 개인 소유라니!) 알게 되었다. 반지 위에 올라 붓는 돌인 줄로만알고 있는 라피스로 화장실 전체가 둘러싸인 것을 보고 눈이 동그래지기도 했다. 터무니없이 비싼 아파트가 그래서 있는 것이겠지. 친구들을 초대해서 멋지게 파티를 치르는 여자들이 부러워서 저도 가끔 사람들을 초대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사람 수와 음식 비례를 계산하지 못해 음식이 모자란 적이 있는가 하면 너무 많이 남아서 어쩔 줄 몰라 한 적도 있었다. 그때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으니 맛이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또 워낙 일손이 느리다 보니 준비하는 도중에 손님들이 들여 닥쳐 반 정도 만들어진 것을 냉장고에 쑤셔 넣게 되는 적은 더 많았다.
그러다가 친구들과의 어느 모임에서 저녁 내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남자가 있었다. 어른들이 항상 남자를 고를 때 이렇고 저래야 한다고 했지만 눈에 뭔가 씌이면 그게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유럽 사람이기 때문에 그 몸에 배인 신사적인 태도와(처음 만나면 신사적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봐. 바보!) 박식한 견문 때문에 내 눈도 그만 완전히 삐어 버렸다. 그것이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이었다.
▲뉴욕 데뷔탄트 무도회. 적령기에 이른 자녀들을 선보이는 행사.
▲뉴욕 사교계의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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