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길에선 가뭄에 콩 나듯 한인을 볼 수 있다. 행인 100명 중 고작 2명꼴이다. 그러나 시애틀 인근의 산에선 한인을 적어도 그 10배쯤 만날 수 있다. 흑인과 히스패닉은 물론 중국, 일본, 인도, 베트남 등 다른 아시아 인종보다도 동포가 훨씬 많이 눈에 띈다.
반대로 한인을 가뭄의 콩보다 더 보기 드문 곳이 있다. 박물관이다. 흑인은 물론 다른 동양계 참관자보다 훨씬 적다. 한인이 박물관보다 산을 더 많이 찾는 이유는 산천경계 자연산수를 좋아하는 민족성(?) 때문일까? 최소한의 건강유지를 위한 방편일까? 아니면, 평소 먹고살기 바빠 박물관 출입을 사치로 여기기 때문일까? 아마 세 가지 다 일 것 같다.
시애틀 다운타운에는 세계적 수준의 시애틀미술박물관(SAM)이 있다. 한인 설치미술가 서도호씨의 걸작 ‘Some/One’(여럿이서 하나를)이 소장돼 있다. 전몰장병을 상징하는 수만개의 군번표가 엮어져 갑옷 형태를 이룬 이 작품은 서씨가 꼭 1년 전 SAM에 영구소장품으로 기증, 신관 2층 한복판에 특별 전시됐다. 그러나 한인 관람객은 별로 늘지 않았다.
SAM에선 ‘한국적 감성’이라는 주제의 한국 미술공예 작품전이 2002년 9월 중순부터 3년 이상 계속됐었다. SAM 산하의 시애틀 아시안 미술박물관(SAAM)에서도 한인 원로사진작가 남궁요설씨 초청 전시회가 ‘우아한 지구’라는 주제로 2006년 5월부터 5개월간 열렸고, 한국 현대도예계의 거장 윤광조씨 초청 ‘산의 꿈’ 전시회가 2004년 11월부터 6개월간 이어지는 등 시애틀 박물관과 한인(한국) 예술가들 사이의 교류가 비교적 활발한 편이다.
시애틀 일원엔 각양각색의 박물관이 즐비하다. 최근 개장한 야외 조각품 박물관이 SAM 인근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다. 어린이 박물관도, 공상과학 박물관도 있다. 시애틀센터엔 억만장자 폴 앨런이 수만개의 기타를 모아놓은 음악경험박물관(EMP)이 있고, 워싱턴대학(UW)엔 헨리 미술박물관과 어류수집 박물관이 있다. 사우스 시애틀엔 흑인역사 박물관, 발라드엔 노르웨이 유산 박물관이 있다. UW 인근의 시애틀 역사·산업 박물관에선 어제 저녁 ‘역사적인’ 서북미 미스코리아 대회가 열렸다. 보잉필드 인근에 비행박물관이 있지만 한인들은 그곳보다 대형 비행기를 조립하는 에버렛 보잉공장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다.
필자가 박물관 얘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따로 있다. 서북미 동양계 이민자들의 애환을 간직한 ‘윙 루크 아시안 박물관(Wing Luke Asian Museum)’이 시애틀 차이나타운의 ‘박물관 급 건물’(100년 묵었다)로 확장 이전, 오늘과 내일 오픈하우스 행사를 갖기 때문이다. 10년간의 계획과 2,320만 달러의 경비를 들인 숙원사업을 끝내고 축제를 벌이는 날이다.
이 박물관의 창안자인 윙 루크는 중국이민 1.5세로 UW 4학년 때 육군에 입대, 한국전에도 참전했다. 졸업 후 변호사가 돼 잠시 주 법무차관으로 일했으며 1962년 37세에 시애틀 시의원에 당선, 서북미 최초의 선출직 동양계 공직자로 기록됐다. 시애틀에서 집을 팔거나 세줄 때 인종을 차별할 수 없도록 처벌조례를 앞장서 제정한 루크는 1965년 낚시여행에서 돌아오다가 경비행기 추락사고로 한창 일할 나이인 40세에 아깝게 목숨을 잃었다.
루크는 한 가게의 지하실에서 나온 낡은 중국 비단신을 보고 친지들에게 민속박물관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친지들은 그가 급서한 다음해, 중국만이 아닌 전체 아시안 이민사회를 아우르는 박물관을 시애틀 차이나타운에 세웠다. 박물관 소장품들은 아무래도 이민역사가 긴 중국과 일본 것들이 대부분이다. 박물관 운영진도 아직은 중국과 일본계 일색이다.
자체 박물관을 가질만한 형편이 아직 못되는 시애틀 한인사회는 윙 루크 아시안 박물관에 합류할 수밖에 없다. LA 한인사회는 요즘 LA카운티 박물관 내에 한국관을 확장하도록 한국일보를 중심으로 모금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우리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산 교육장인 박물관을 좀 더 자주 방문하고, 자손들을 위해 좀 더 많이 지원하는 것이 좋겠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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