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비소리
이윤우 법사 / 전 대불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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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명력을 운반해 가는 것이 운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명은 절대로 절대로 일회적인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삶을 한없이 토막내어 살 수 있는 사람에게는 운명적인 순간이 점으로 이어져 온 것이므로 <비껴간 운명 때문에> 같은 것을 되씹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무수히 닥쳐올 운명(chance)들을 맞을 준비가 더 바쁘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운명적으로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평범한 삶도 알고보면 대단히 극적인, 운명적인 그런 것이다. 자꾸만 바뀌나는 것이다.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몸의 피와 세포처럼 생명력은 자꾸 변화를 모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명인즉은 혁명이다. 나의 의식에 나타나는 변화가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의식이 나태해져서 변화와 혁명이 없는 것이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허물이기도 하다.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지 않고서야 어찌 화신(변화신)이 될 것이며, 화신이 안된다면 또한 삶의 참다운 즐저움은 생기지 않는다. 이러한 즐거움은 마음에 자비와 평화를 품고 있을 때 가능한 희락인 것으로, 이빨을 보이며 웃어제끼는 그런 즐거움과는 다른 것이다. 이때의 거듭되는 변신(혁명)은 한소식이나 계시와 같은 영적인 감각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다. 우리의 부처님이신 석가모니께서는 백천만억번이나 영적 변화와 혁명을 겪었다는 것이 아니던가(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 Well-being을 넘어서서 Whole-being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운명짓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을 찾는 노력은 인간존재와 더불어 시작되어 여태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사주나 팔자 같은 것이 우리를 운명짓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왜 나는 하필 그해 그달 그날짜의 그 시간에 태어난 것일까, 하는 것은 따지고보면 불가사의한 무엇이 있기는 한 것 같다.
그러나 한 인간의 출생일시라는 단 한가지 요소가 운명을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믿어도 좋을까. 사주와 팔자에다가 음행오행까지 가미하고 또 괘를 창작하는 등의 노력을 집대성해서 <역경> 또는 <주역>이라고 하는 대단한 경전을 공자께서 편찬했지만 역시 그 신뢰성을 주저함을 불식시킨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인간의 길흉화복이라는 세속적인 현실을 너무 절대시한 가치관의 천박함 때문에 항상 비판에 시달려 왔고 또한 그 확률성은 이성적인 과학정신의 공격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한편 유일신을 숭상하는 이들은 자기의 신이 자기운명의 키를 잡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 그 신의 이름은 민족에 따라 다양하다. 제석천황이라는 중국인의 개념이나, 브라만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힌두의 신이나, 여호와라는 유태교 기독교 교인들이나, 하느님이 그 신의 이름이라는 유리 한민족이나, 누구나 다 신이 운명을 좌지우지한다는 믿음도 있다.
불교에서는 물론 <업>이라는 것이 있어 그 업력의 끌림에 따라 운명이 왔다리갔다리 한다는 것인데, 하물며 우리의 생각(식)까지도 업보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사람이 앞에 나설 일은 전혀 없다. 일체의 존재는 업보의 표현일 뿐, 실재하는 존재란 당연히 없는 것이며 연기(이어지는 삶)의 주체는 업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뒤에 의식이 연기한다는 아뢰야식(장식) 연기나, 참되고 한결같은 무엇이 하나 있어서 그것이 연기된다는 진여연기와 또는 이법게(존재의 세계) 자체가 원래로부터 연기 속에 있어온 것이지 무슨 주체가 따로 있어 연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법계연기까지 거론되어 온 것이다.
어쨌거나 이 모든 종교나 철학이나 사상이 다 함께 운명(목숨의 이운)이 매우 역동적이고 많고 많은 변화의 기회를 가진다는 것이 공통된 주장이다. 사주와 팔자와 음양오행이 모두 무지무지하게 다이내믹(역동적)한 것이고, 신이며 하느님이도 만생만사의 인생역정에서 중중생생을 분투해야 할 것임을 거듭 못박은 것이며, 나는 없고(무아) 차라리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있다 할 것이 없고, 오직 출렁이고 파도치는 업보뿐임을 보이는 불교는 생명 그 자체를 노래한 운명 그 자체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장엄한 공자 예수 석가모니 등의 성인은 물론 모든 창조적인 인물들이 전부 운명의 역동성을 구현한 사람들이다. 나의 존재와(유아)와 나의 소유(아소)와 나의 잘남(아만)에 묶여져서 변화를 거듭하는 생명의 진화적 운명에 동승하지 못하고 노예로서 자리하고 있는 뭇삶을 슬퍼한 것은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셨다.
운명은 안정되어 있지 않고 불확실하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력의 본연한 모습이며 역적인 진화와 변화신이 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꿈같은 존재론에 고착하지 말라고 이른 것이다(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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