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일월이여/내 마음 더 여리어져/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견딜 수 없네/흘러가는 것들을/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변화와 아픔들을/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보이다 안 보이는 것/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시간의 모든 흔적들/그림자들/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이니/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정현종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과 그림자들은 상흔이라고……사람의 일들은,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늘 흔들리고 또 흔들리고 아프고 아픈 거라고 말하는 시인처럼, 언제부터인지 나의 마음도 자꾸만 여리어져 변하는 것들이 아파서 견딜 수 없는거다. 그리고 그렇게 영원의 시간속에 순간으로 사라져가는 지상의 모든 것들,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것들을 향한 알 수 없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가슴에 이따금씩 밀물처럼 밀려오고는 한다.
담장위로 보랏빛 라일락 꽃들이 늘어지게 피어있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내가 뛰어 놀던 골목길, 한없이 크게만 보이던 어릴적 학교 운동장, 오래된 빛 바랜 흑백 사진 속 유년의 날들, 하얀 벚꽃들이 눈 오듯이 쏟아져 내리던 눈부신 봄날의 가로수길, 호수에 자욱하게 피어 오르던 푸른 새벽 물안개, 언제인가 가 보았던 남해안 쪽빛 바닷가 가난한 작은 어촌 마을과 이름모를 생선들을 커다란 고무 다라에 가득 담고 파는 소박한 어촌 사람들로 북적대던 어시장, 버스 창가에 기대어 바라보았던 시야 바깥으로 사라져 버리던 햇살 가득했던 풍경속 기억들이, 나뭇잎을 우우 흔들던 바람소리들과 빗소리들이, 사랑했던 이야기들이 잊지 말아달라고, 기억해달라고 되살아 나서 거침없이 나에게 달려오거나, 때때로 꿈 속에서 아련하게 다가오고는 한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가는 것들이 이렇게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 올 때면, 따뜻하고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가에서 성냥불을 그을 때마다 성냥 하나 하나에서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식탁을 보고, 아름다운 선물들을 보고, 그리운 사람이 보이고……작은 불빛에서 환영을 보는 어린 성냥팔이 소녀라도 된듯이 나는 잠시의 행복과 긴 그리움 그리고 슬픔에 잠기고는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 반짝이다 꺼져 버리고 마는 성냥 불빛 같은 찰라의 꿈을, 비가 퍼 붓고 난 저 멀리 하늘에 떠 있다가 사라지고 마는 무지개 같은 아름다움을, 어두운 밤하늘에 피어 오르다 스러지는 불꽃들처럼 보이다 안 보이는 것과, 어쩌지 못하는 사이 시간과 함께 하염없이 흘러가는 것들을 나는 자꾸만 허공으로 손을 뻗쳐서 잡고 싶은거다.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 오르는 새처럼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어디론가 먼 곳으로 떠돌고 싶어지는 날이면, 햇살과 달빛 아래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들꽃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피어있는 것만으로도 그저 눈물나게 기쁘다고……아무도 모르게 잠시 피었다 소리없이 져버리는 생이기에 좋다고 나에게 속살거린다.
사라지는 것들은 흘러가는 바람 같은 것이니 잡으려 들지 말라고……봄꽃은 짧게 피었다가 머문 흔적없이 지기에 그래서 더 애잔하고 아름다운거라고……너의 그리움과 사랑은 지나가는 세월에 묻어 놓고 그렇게 강물처럼 흘려 보내라고 나에게 소근거린다.
짧은 봄날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들을 견딜 수 없어 붙잡아 남겨놓고 싶은 마음과, 해가 뜨면 걷히고 마는 안개 같은 우리의 생은 한 줌의 재로 소멸하기에 아름다워 떠나 보내고 싶은 마음이, 내 안에는 이 두가지 마음이 늘 다투는데……그러면서도 나도 어쩌지 못하는 그리움이 자꾸만 차오르는거다.
아……처음부터 나는 왜 이 길로 들어섰던 것일까……잠시 보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시 보이게 해야 하는 이 길로……아침에 잠에서 깨어 눈을 뜨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아름다운 꿈을 손으로 다시 잡아야 하는 것 같은 이 길로……바보처럼 이 무모한 사랑을 나는 왜 시작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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