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산문
=====
전혜린, 레마르크, 라비크, 루이제 린자, 니나 부슈만, 헤르만 헤세, 골드문트... 뜨겁고 독한 커피, 오렌지 껍질, 압쌍뜨.. 또 내가, 그리고 아마 나뿐 아닌 그 시절 모든 젊은이들이 동경하며 열광하던 슈바빙..
책장을 정리하다 루이제 린자의 ‘생의 한가운데’가 나왔다. 가난하고 옹색하던 시절, 그러면서 그 황량한 벌판에서도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아가며 성장통을 앓느라 기진맥진 했던 시절에 내 몸뚱이의 일부인줄 알고 끼고 다녔던 책이다.
작가는 주인공 니나를 이렇게 서술한다. 열 두엇의 나이의 그 여자는 자기 언니의 결혼식 날 언니의 면사포를 들으랬다고 면사포에다 침을 뱉는다. 그 여자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말만 한다. 그 여자는 예의 바르지 않다. 그 여자는 사람에게 노골적으로 무슨 불쾌한 말도 대놓고 할 수 있다. 자신은 자신이 단지 직접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여자는 인간이 허위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시위한다. 그 여자는 아무데나 충돌하고 입 안을 태우고 툭하면 모험 속에 얽혀 들어가고 언제나 맨 극단에 있는 대담한 존재이다. 그녀의 언니가 몇 년 만에 우연히 술집에서 그녀를 보았는데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위스키 다섯 잔을 마시고 있었다. 니나 자신은 인생을 이렇게 정의 한다.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릴만한 위험이 없는 생이란 무가치한 거야.”라고. 그러면서 자신의 옛 남편의 새로운 여자에 대해 평할 때, 그녀가 갖고 있는 여러 나쁜 점 중 가장 용서 할 수 없는 것은 그녀가 화가임에도 그림을 못 그린다는 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기막힌 서술을 갖은 여자가 그 때는 생의 한 가운데서 불꽃 같이 사는 여자라고 해서 사춘기의 애들에게 인기가 짱이었다.
못난 사람은 그냥 죽어 마땅하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하다니... 정말 못나면 끝인가? 잘났는데 정말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고 하나도 뛰어난 구석 없지만 그저 그 사람이 내 근처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내게 또 하루를 살 힘을 주는 사람도 있는데...
니나가 지금 내 주위에 있다면 나는 그녀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사랑할 수 있는가?
수십 년이 지나 누렇게 변한, 조잡한 활자를 보며 참 난감한 마음으로 나는 그 기막힌 구절을 거꾸로 만들어 본다. “삶에서 아주 사소한 것일 지라 해도 마음 깊이 간직하며 소중히 끌어안는 생이란 가치 있는 거야.”
세월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이토록 정반대의 시선을 갖게 하는 것일까? 하긴 모험하지 않는 젊음은 비겁한 것이고 관용할 줄 모르는 늙음은 바보라는 진리의 말씀도 있으니까.
글쓰기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특히 그것이 세상을 미처 살아 보기도 전에 돌격하는 맘으로 생을 노려보는 나이의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오싹하도록 무섭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