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음의 소리
윤선중 교무<원불교 샌프란시스코 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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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5월 21일. 힌디 문학 수업이 있는 날은 어김없이 과제를 새벽까지 마치고 정신 없이 책가방을 정리하고 집을 나선다. 밤새 작성한 리포트를 출력해서 막 나가려던 순간, 갑자기 어머니께서, “성하야, 할머니께서 꼭 인사를 하고 가라고 하시네.” 그제서야, ‘아, 할머니께 인사 드리는 것을 잊었구나.’ 누워계신 할머니에게로 다가가 “할머니! 제가 지금 학교에 늦었거든요. 학교에 갔다 와서 얘기하면 안될까요? 제가 할머니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시지요?” 하면서 바쁘게 방문을 열고 나올 때, 조용히 웃으시며, “그래.”
바쁘게 뛰어서 지하철로 가는 버스를 타고, ‘용산행 열차를 놓치면 지각인데, 휴~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지하철에서 출력한 리포트를 읽어보고, 강의실 도착. 교수님 들어오시기 전 리포트를 탁자에 올려놓고, 다시 안도의 한숨. 어! 수업 중간 울리는 핸드폰 소리. 놀란 나머지 얼른 전원을 끄고. 어느덧 종이 울리고, 강의실을 나오자 마자 핸드폰을 열어서 어디서 온 전화일까. 집. 어머니의 떨리는 음성, “성하야, 할머니께서 오늘 아침에 열반에 드셨단다.” 아! 할머니, 수업만 끝나면 얼른 제가 집으로 달려가려고 했는데요!
생명의 흐름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그리고 병들어가고, 그러면서 어느덧 죽음의 순간은 누구에게도 예측하지 않고 찾아온다. 작년, 이제 원불교 교무가 되기 위한 과정을 모두 마치고 출가식을 앞두고 기다리던 11월, 어느 분이 “윤 교무님은 내년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실 건가요?” 하고 물었다. “바로 다음 순간도 어찌될 지 모르는데, 1년 후의 제 모습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만 지금 현재에 살아있고 숨쉬고 있음에 감사하고, 그러면서 살아있는 이 순간에 온전히 깨어서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내일이 오늘처럼 온다는 것을 알기에, 10년이 걸릴 일도 오늘부터 시작하고, 100년이 걸려 이루어질 일도 지금 순간부터 시작합니다.”
부처님은 영겁을 하루같이 사신다고 한다. 그것은 지금 현재에 살아있음에 온전히 깨어서 참나와 내 주위 인연의 존재에 온전한 마음으로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 이 순간 찰라 이지만, 온전히 깊이 깨어있음으로 나에게, 가족에게, 친구에게, 그리고 이 생생 약동하는 우주에게 소리 없이 대답하는 것이 아닐까. 어디로 향하는 지 모르고 뛰기보다는 그래서 진실로 소중한 것을 놓치고 마음에 깊은 후회를 남기기 보다는 지금, 고요하게, 가만히, 선명하게 퍼지는 이 공감과 경이를 나 자신과 부모님과 스승님과 그리고 내 주위의 모든 인연들과 깊이 나누면서 살아감이 어떨까.
5월이 되면 할머니 열반 즈음 지었던 시를 되 내이면서 지금 이 순간, 나를 바라본다. 이 찰라, 욕심도, 앞으로 바삐 달려감도, 후회도, 집착도 끼어들 수 없는 소중한 나를.
침묵 속에 당신과 이야기 하게 하소서
5월의 새벽
풀내음이 가득한, 맑은
숨 들이쉬며.
당신의 이야기 속에
침묵하고
당신의 침묵 속에
이야기하게 하소서.
죽어가는 이의 거친 숨소리에서
생명을 느낍니다.
지금 여기에……
원불교 샌프란시스코 교당 윤선중 교무의 약력을 소개 합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어과 졸업, 원불교 교무 서원(2002. 1),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졸업(2005. 2), 미주 선학대학원 졸업 원불교학 석사(The Won Institute of Graduate Studies, PA, Glenside)(2007. 8), 원불교 교무 출가식(20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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