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기사를 쓰다 보면 한글 어휘력이 의심스러워진다. 아예 한 문장이 영어 단어의 한국식 발음 나열일 때도 있다. 어떤 영화에서 “조사를 빼면 모두 영어”라고 지탄 받았던 패션 컨설턴트의 꼴이 돼버리는 것이다.
하긴 ‘패션’ 자체가 미국에서 온 말이다. 한글을 고집한답시고 패션을 옷 입기라고 쓰면 왠지 딴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회사명, 제품명도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사람 이름에서 따온 것이 많다보니 번역이 불가능하다. 또, 오드리 헵번처럼 옷 입기라고 쓰는 것보다는 오드리 헵번 룩으로 표기하는 것이 간단명료하고 이해가 빠를 때도 있다.
그래서 변명 같지만 패션 기사는 어쩔 수 없이 괄호 안 설명을 덧붙여 영어 나열을 한다. 누구를 가르치려는 의도가 아니다. 스키니를 ‘쫄바지’로, 레깅스를 ‘타이즈’로, 사브리나 팬츠를 ‘맘보바지’로 표현하면 왠지 패션 감각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고, 필수품목보다는 ‘머스트-해브 아이템’이라고 써놓아야 패션에 관해 좀 아는 것 같아서다.
사실 패션은 유행이 바뀔 때마다 용어도 바뀐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맞긴 한데 패션 용어는 돌고 돌지 않는다. 요즘 유행하는 빈티지가 단지 구제, 중고의상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이 패션은 한 바퀴 돌면 변화를 겪고, 진화라는 걸 한다. 빈티지 패션이 중고의상 감각의 패션으로 광범위해지는 것과 같다. 또, ‘잇-백’이니 ‘셀렉트 샵’ 같은 신조어의 등장도 다반사여서 패션 지수 체크를 하다보면 영어와 상식시험을 치루는 기분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화하는 흐름인 걸 어찌하랴.
지난달 뉴욕타임즈가 한인 캐롤 림씨가 버클리 동창과 함께 운영하는 패션 부틱 ‘오프닝 세레모니’를 특집기사로 다루었다. ‘Be a Fashion Insider Or Just Look Like One’이란 제목이 붙었다. ‘패션 인사이더’라는 말을 두고 한참을 망설였다. 패션계 내부의 사람으로 쓸까, 아니면 패션계 종사자로 표현할까. 패션 감각을 지닌 사람은 어떤가. 그 어느 것도 어감이 살지 않아 결국은 또 패션 인사이더로 표기하고 말았다.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영어 관용구보다는 한자성어에 비중을 두고 자란 세대의 쓸데없는 고민이다.
세련된 젊은이를 지칭할 때도 ‘칙’(chick)보다는 ‘영계’가 잘 통하는 세대는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늦다. 더 나쁜 것은 변화하더라도 위험하지 않은 변화를 꿈꾼다. 그러나 세상은 계속 변화할 것이며, 발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변화를 기회로 삼을 수 없다. “난 큰 욕심 없어. 이대로 사는데 만족해”라고 말하기엔 변화하지 않고는 현상유지조차 힘든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제는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변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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