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작품 앞에 선 생전의 앤디 워홀.
‘본드 넘버 9’이 최근 출시한 향수 ‘앤디 워홀 유니언 스퀘어.
21년 전 사망한 팝 컬처의 선구자
“대중적 친근감이 강점”그림 7천만달러에 팔려
향수·보석부터 스노보드·수영복까지
작품 사용한 제품들 쏟아져 나와
앤디 워홀은 21년 전에 사망했다. 그런데도 요즘 그는 여전히 생산적(그리고 고수입)이다. 그의얼굴은 갭 스토어 창문에서 샤핑객들을 응시한다. 그의 작품들은 스노우보드 위에서 슬로프를 질주해 내려온다. 뿐만 아니라 리바이스 청바지와 로열 일레스틱스 신발, 그리고 곧 출시될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 수영복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다.
팝 컬처 팬들은 워홀 보석류와 시계를 착용하고 워홀 향수를 뿌려대며 워홀 핸드백을 어깨에 걸친다. 열성적인 워홀 팬들은 집안의 카펫에서부터 식기, 그리고 침대의 린넨까지 워홀로 꾸민다.
가히 ‘워홀의 세계’라 할 만하다. 뉴욕에 소재한 ‘시각 예술을 위한 앤디 워홀 재단’은 그의 작품에 대한 라이선스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고급품에 라이선싱 사업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난 1997년 우리는 라이선싱으로 40만달러를 벌었다. 그런데 지난해는 라이선싱을 통해 벌어들인 돈이 200만달러를 넘었다”고 이 재단의 라이선싱 책임자인 마이클 허만을 밝혔다. 라이선싱에는 CB2.com을 통해 개당 3달러95센트에 판매되는 멜라민 접시 같은 제품도 있고 전국 400개 스토어 창문에 워홀의 머그작품 이미지를 활용해 칼러가 화려한 봄 의상을 판매하고 있는 갭 같은 업소도 있다.
생존해 있건 사망했건 워홀처럼 많은 제품에 연관돼 있는 예술가는 드물다. 지난 1966년 워홀은 ‘빌리지 보이스’라는 잡지의 안내 광고를 통해 담배에서부터 휩 크림에 이르기까지 어떤 상품이라도 인돌스 하겠다는 뜻을 밝힌바 있다. 팝 컬처를 형성하는데 일조한 워홀은 지금 그 팝 컬처를 통해 자신의 사후 인돌스먼트를 확산시키고 있다.
워홀 재단의 허만은 “그는 일찌기 자기 자신을 하나의 브랜드로 보았다. 다양한 아이템들을 프로모션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본 것”이라고 진단했다. “워홀은 우리 컬처속에 너무 깊이 침투해 있어 우리가 행동하고 말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워홀 현상의 원인은 무엇인가. 가장 근본적 이유는 그의 작품이 예술에 무관심한 사람들조차 접근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는 팝의 제왕이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팝 아트란 파퓰라 아트이다.” 크리스티 경매소의 포스트워/컨템포러리 작품 담당인 브렛 고비는 이렇게 지적했다.
지난해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워홀의 작품 ‘녹색자동차 충돌’(Green Car Crash)이 그의 작품으로는 최고가인 7,150만달러에 팔렸다.
워홀 향수는 어떤가. 틈새시장을 노리는 향수업체 ‘본드 넘버 9’(Bond NO. 9)의 마케팅 디렉터인 알릭스 페레즈는 “워홀은 향수에 미쳤던 사람”이라고 밝혔다. 이 회사 제품은 뉴욕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제품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본드사는 지난 달에 두 번째 워홀 향수인 ‘앤디 워홀 유니언 스퀘어’(Andy Warhol Union Square)를 출시했다. 가격이 3.4온스에 195달러인 이 제품 병에는 워홀의 작품인 ‘꽃’ 시리즈가 그려져 있으며 과일 향과 꽃향기가 담겨 있다.
워홀 제품은 싸지가 않다. 버튼 스노우보드는 550달러이며 오리엔탈 위버사가 제조하는 큰 러그는 1,300달러나 한다. 그런데도 이 제품들은 잘 팔린다. 마릴린 먼로 패치를 댄 리바이스의 워홀 팩토리 X 청바지는 400달러이며 세이코의 워홀 시계는 35달러에서 300달러까지 한다.
이런 제품들이 잘 팔리면서 워홀 재단의 기금은 2억4,000만달러로까지 늘어났다. 재단은 이 가운데 올 한해 1,100만달러를 워홀의 반항아적인 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예술단체들에 지원할 계획으로 있다.
앤디 워홀은 누구
시대에 대한 통찰을 시각화한
현대 미술의 아이콘
1928년 펜실베니아 피츠버그에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피츠버그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졸업 후 뉴욕에 정착, 잡지 삽화와 광고 제작 등 상업 미술가로 큰 성공을 거둔다.
1960년 기존의 상업미술 대신 순수미술로 전환해 배트맨, 딕 트레이시, 수퍼맨 등 연재만화 인물 시리즈를 그린다. 하지만 고상한 예술만을 중시하던 뉴욕 화상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그러다 1962년 뉴욕 시드니 제니스 갤러리에서 열린 ‘새로운 사실주의자들’ 전시에 참여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워홀은 수프 깡통이나 코카콜라 병, 달러 지폐, 유명인의 초상화 등을 실크 스크린 판화 기법으로 제작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부터 사교계나 정계 인물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1972년부터 ‘마오’(Mao) 시리즈로 다시 회화 제작에 전념했다. 1987년 2월 담낭 수술과 페니실린 앨러지 반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워홀은 현대 미술의 아이콘이 됐다. 생전에 이미 전설이었던 그는 시대의 문화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이를 시각화 해 내는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세상의 거울’이라고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캠벨 수프’ ‘두개의 마릴린’ ‘재키’ ‘마오’ ‘잠’ ‘자화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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