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쳐보기에 열광하는 사회에 대하여
1.신화의 탄생
바르트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신화가 될 수 있다. 멀게는 그리이스-로마 신화에서 가깝게는 현대사회의 갖가지 성공신화와 담론 전반에 이르기까지 신화의 폭과 수위는 근대 사회 이후 점점 더 광역화하는 현상을 보여왔다.
신화의 탄생이란 바야흐로 상식의 수준을 넘어, 이미지와 문자로 이루어진 담론 영역 전체를 포괄하는 일종의 문화적 행위로 세계에 작용한다.
신화가 탄생되는 과정은 간단하다. 기표에 기의가 결합하는 기호형성의 일차원적 과정이 발생하고 나면, 그 다음 순서로 기호 자체가 기표화하는 함축적이고 이차원적인 기호의 진화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신화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쉬운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청바지’라는 의복의 탄생은 ‘청바지’라는 기표와 ‘진으로 만들어진 작업복’, ‘질김’, ‘광산 노동자’, ‘저가’ 등등을 표상하는 기의와의 결합을 통해 일차원적 기의-기표 결합과정을 통해 하나의 의미 즉, ‘청바지’로 탄생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청바지’라는 기표가 포괄하는 기의는 ‘젊음’, ‘풍요’, ‘자유’, ‘새로움’, ‘변화’ 등, 더욱 함축적이고 포괄적인 기의와 결합, 하나의 ‘청바지 신화’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동서 냉전 시기, 구 소련 청년들의 청바지에 대한 열광은 패션 혹은 의복으로서의 청바지 ‘자체’에 대한 순수한 열광이 아니라, ‘청바지’의 신화, 즉 ‘청바지’가 상징하는 ‘젊음’, ‘풍요’, ‘자유’, ‘새로움’, ‘변화’라는 함축적 기의들에 대한 매료라고 해야 할 것이다.
2. 현대의 신화
바르트 식의 ‘기의-기표’를 통한 ‘신화 창조’의 공식은 현재에는 더욱 유효하다. 북경의 ‘맥도날드’, ‘시즐러’, ‘TGI FRIDAY’나, 서울의 ‘스타벅스’와 ‘에버크롬비’ 열풍이 또한 이러한 의미의 자장권 안에 있다.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는 단지 햄버거와 커피의 층위를 넘어서 ‘미국적’인 ‘풍요로움’과 ‘자유로움’을 의미하는 제 1세계와 세계 자본주의의 함축적 기호로써 세상을, 제 3세계의 정신을 지배한다.
그것은 자본과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제국주의적 강탈의 또다른 모습, 세련된 얼굴이다. 칼과 총으로 국경을 허물고 주권을 강탈하는 제국주의적 침탈이 19세기와 20 세기를 지배하던 제국주의의 주된 얼굴이었다면,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침탈은 더욱 기술적인 저강도 침탈의 완성본이라 명명될 만하다.
그리고, 이러한 저강도 문화 침탈에는 뚜렷한 자각현상이 따르지 않는다는 점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어쨋든, 현대 사회는 이러한 함축적 기의가 만들어 낸 이미지 즉 코드가 지배하는 사회이며, 인간은 코드와 이미지의 정치학에 지배받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상상해 보라.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도심의 거리, 한 잔의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바쁘게 걷고 있는 여인이 있다. 젊고, 이지적인데다가, 눈 튀어나오게 아름답기까지한 그 여자는 고소득 전문직 여성으로 보이는 우아하고 품위 넘치는 고가의 패션으로 날씬한 몸을 감싸고 있다.
우리는 이 한장의 사진을 통해 다음과 같은 기의의 조합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밥과 국으로 올챙이 배를 만드는 아침보다, 스타벅스 커피 한 잔으로 시작하는 여자의 아침이 더욱 매력적이며 풍요롭고, 프레샤야스하다. 젊고, 매력적이며, 부유하고 지적인 여자가 되고 싶은가? 여성들이여, 스타벅스 커피를 마셔라.” 정도의 기의의 조합이 이루어지고, 이 지점에서 스타벅스의 신화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 때, 신화를 창조자이자 공급자는 스타벅스 커피 회사와 사진작가이며, 신화의 소비자는 바로 우리가 된다. 우리는 이 한 장의 사진을 통해 탄생한 신화, 즉 기의의 조합 혹은 이미지로 인해 아침마다 쓰린 속을 쓸어내리며 애써,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바보짓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 신화란 일단 탄생하고 나면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므로.
3. 응시(look)의 역학
이처럼, 기의와 기표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정보 즉 이미지는, 인간의 눈이라는 광학 렌즈를 통해 망막에 투사된 영상을 기억의 창고에 저장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응시’라는 행위가 개입하게 된다.
영상학에서는 응시를 크게 첫째, 카메라의 응시 둘째, 관객의 응시 세째, 등장인물 상호간의 응시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에 의하면, 응시란 주체와 객체 뿐만 아니라 객체 상호 간에도 발생하는 일종의 다자간 정보 유통 방식 정도가 되는 것인데, 이러한 ‘응시’라는 방식을 통해, 현실과의 유사체이자 등가물인 아나로곤 (analogon)이 형성, 축적되는 것이다. 즉, 응시라는 행위가 없다면, 기의와 기표의 조합이나 선택, 축적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필름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는 응시라는 문제에 대한 남다른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작품이다.
존과 앤 부부의 친구인 그레이엄의 비디오 카메라는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주체적 응시자이다. 처제인 신시아와 불륜을 즐기는 존, 그 사실을 알면서 부정하는 앤, 성적으로 불구인 그레이엄, 그리고 앤의 여동생 신시아. 이들은 모두 카메라라는 절대적 응시자 앞에서만 자신에 대한 응시와 고백이 가능하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자신의 욕구와 욕망이 구조하는 세계만을 들여다 보도록 제작된 인형처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응시로부터 시종일관 먼 곳에 존재한다.
결국, 카메라라는 응시 기계만이 이들을 인간의 눈으로 세계를 응시할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은 무척 재미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레이엄이라는 인물은 어쩌면, 카메라 렌즈 하나로 세계를 응시하기 시작한 27세의 소더버그 감독 자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주에 (하)편이 계속됩니다.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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