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민속촌 내: 예수님 당시모습의 목수
성지교회와 우리의 교회
지난 11주간 동안 나는 독일 마르틴 루터의 신앙유적지와 이집트, 요르단 및 이스라엘 지역 등 성지 방문기를 주로 그 지역들의 교회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함께 나누어왔다. 성지방문을 위해 후원해 주신 C장로님 내외분에게 감사를 드리며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 하려한다.
그럼 처음부터 관심이 왜 교회에 있었으며 또 저들의 교회가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답은 간단하다. 저들 교회들이 지난 역사 속에서 겪어 온 이야기들이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반성해 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독일 루터교회 및 중동 지역에서 처음 본 곱틱교회나 동방교회 등이 이름만큼이나 그 보여지는 외양에서는 모든 게 생소하였지만, 나에게는 한결같이 저들이 바로 내 교회라는 생각이 가슴 깊이 느껴졌다.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간단하다--예수 그리스도. 이는 바로 예수님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인종과 지역 및 전통과 시대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복음이라는 사실임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사실 500여 년전 독일 한 시골 동네의 신부 마르틴 루터라는 사람이 바르트벅이라는 첩첩 산중 성 안에서 교회 현장에서 겪은 수 많은 상처로 인해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또 성경을 읽고 번역하며 씨름하는 가운데 보내던 11개월의 고통스런 여정이 지금 미국 땅에 살아 가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울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몸담아 섬기는 교회를 사랑하지만 그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와 아픔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루터의 이야기가 남다르게 들릴 것이고, 더욱이 루터가 육신의 안일을 버리고 바르트 벅을 내려와 종교개혁의 남은 과제를 이루기 위해 비텐벅으로 달려갔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하나님의 비장한 음성으로까지 들릴 것이다.
루터의 독일 교회가 중세기 유럽의 기독교 문화권 내에서 물량주의와 교권주의를대항해 말씀중심과 회중 중심의 교회를 세우려는 싸움이었다면, 오늘의 중동교회는 어쩌면 2000년 전 로마제국의 압제하에서 예수님이 펼치신 평화와 화해운동을 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마치 무너질 수 없는 철권과 같은 이슬람 치하에서 정치 경제적으로는 물론 일상생활에 많은 불이익을 당하면서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는 것은 물론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면서 복음을 위해서 애쓰는 저들, 또 복음을 말이 아닌 삶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이들을 포용하는 방법으로 교육과 구제사업을 펼치는 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면서 나는 이들 교회가 비록 힘이 약하고 미약하지만 진정한 예수의 후예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이런 교회와 복음의 일꾼들을 만나면서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며 심지어는 믿음의 표현 방법까지도 다른데 우리를 하나의 형제애로 묶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할 뿐이다.
그러나 중동에서 만난 믿음의 형제들이 우리를 보는 시선은 한 가지로 곱지만은 않았다. 우선, 저들의 눈에 대부분 미국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의 협력자로 보여지는 게 문제다. 비록 저들이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도들의 핍박을 받고 있지만 자신들이 아랍민족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에 중동사태가 이슈가 되면 심지어는 기독교인들도 이슬람교도들과 민족적인 연대감을 가지고 미국과 대항하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또 일부 기독교인들이 가진 친 서방적인 경향이 동료 아랍인들 사회에서는 저들을 왕따시키는 이유가 되고 있어 이것이 선교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물론 기독교인들의 입지를 어렵게 만든다고 했다.
결국, 중동의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갈등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는 셈인데 저들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고 결국은 우리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서라도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기독교 시오니즘(Christian Zionism)의 바른 이해이다. 일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민이며 동시에 유대인의 이스라엘 귀국은 예수님 재림의 시기가 가까웠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니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저들을 돕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도리라고 믿는 신념을 기독교 시오니즘이라고 부른다. 불행히도 이들은 이스라엘이 아랍백성들을 향해 행하는 무력군사주의까지도 지지하고 심지어는 이스라엘을 돕기 위해 재정적인 모금까지 압장서고 있다.
이에 대해서 기독교 시오니즘을 비판하는 분들은 첫째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롬 9:8)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서 유대인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약속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가르친다. 즉,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고 예수 믿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이니 특히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유대인들만을 지원하는 것을 경계한다. 오히려 유대인을 진정으로 돕는 방법은 저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요8:39), 즉 “가난한 자 약한자 나그네된 자들을 섬기라”는 명령도 함께 저들이 실천하도록 깨우치라고 한다.
둘째로, 이스라엘 땅이 성지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순교자 스테반의 말대로 하나님은 어느 특정 장소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에게는 하늘이 그 분의 보좌요 땅이 그 분의 발등상이기 때문이다(행7:49). 따라서 이 땅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땅과 성전이 중요하지만 모두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디에 살든지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주님이 공중에 재림하시는 순간(살전4:17)까지 이 땅에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12:20)는 말씀을 실천하며 서로 문화와 인종이 다르고 심지어는 종교가 다른 이들까지도 사랑하고 섬기며 이 땅에서 평화의 일꾼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 땅의 기독교 교회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실천하는 손과 발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입은 예수님 한분으로 족하고 우리 모두는 그 분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할 뿐이다. 오늘날 교회 분쟁의 주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주로 교회 내에서 많은 분들이 입의 역할이 되기를 원하고 손과 발이 되기를 원치 않음에 있다.
특히 미국내 한인교회의 경우 교회가 자기의 문화와 언어적인 장벽에 갖혀 담장 너머 바깥 세상의 다양한 타문화권과의 협력하에 넓은 의미의 선교에 함께 동참하며, 나와 믿음의 견해가 다르고 예배드리는 방법과 배경이 다른 이들과 함께 교류하며 성숙해 지는 기회를 갖지 못하기에 결국은 교회가 계속 고립되어 가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사야 19장 말씀이 떠오른다:“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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