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의 도시 베이징을 가다-마지막 편
경극을 보며 생각하는 ‘황색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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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리장성에 오르다.
한 사흘 감기를 앓은 뒤끝은 말할 수 없이 침울했다. 몇 일 전의 만리장성행 뒤로 이른바 북경 독감에 몸살까지 겹쳐 앓았더니, 눈 밑에서 시작된 검은 그림자(속칭, 다크서클)는 턱 밑까지 장장 세치나 늘어졌고, 얼굴은 바야흐로 석달가뭄에 말라 비틀어진 논두렁 같아서, 비루먹은 팬더곰이 따로 없지 싶었다. 북경사람도 마다한다는 1월의 장성행이었으니 오죽했겠는가. 시름시름 감기나 한 사나흘 앓는 데에서 그친 것이 어쩌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지도 몰랐다. 서릿발처럼 시퍼렇게 서있는 팔달령, 해발 1015미터의 북풍 한설 몰아치는 장성에서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누었던 동부의 모 대학 교수는 에베레스트 등정에나 오른 듯 기개에 찬 장광설을 읊조리며 기념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건만, 나는 비루먹은 개처럼 그저 목이나 한껏 잠바깃 속에 구겨넣고 눈알만 디룩디룩 굴리며, 모진 바람 피할 일에 여념이 없었다. 똥바람(이런 비속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음을 사죄드린다. 이런 비속어를 꼭 써서라도 그 생생한 현장감을 꼭 전달하고픈 필자의 심정을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이해해 주시길.)도, 똥바람도 그런 똥바람이 있을까. 삼간초목을 다 넘어뜨리며 불어오는 그 모진 바람은 세상만사 홍진의 썩은 명리들을 천리만리 날려버리겠다는 기세로 으르렁대며 불어제꼈다.
나는, 대학원생들을 이끌고 장성 답사에 나선지 올 해로 세 번 째라는, 약간 과장된 자부심을 슬쩍슬쩍 드러내 보이던 교수보다, 오히려 교수의 온갖 짐을 지고 서있던 조교를 잊을 수 없다. 매서운 바람 앞에 연신 나부끼던 그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추례하고, 피곤하고, 우울해 보이던지 말이다.
세상의 모든 조교들의 춥고 배고픈 모습을 본 듯, 나의 십수년 전의 처지를 또한 생각키운듯, 에고 뭐랄까, 왠지 막 슬퍼졌다.
여담이지만, 재미난 얘기 하나 안하고 지나가면 서운할 터.
조교 하나 달랑 데리고 북풍한설 속에 장성을 답사하느라 육신을 혹사하고 있던 그 교수는, 모진 바람에 입가의 침이 얼어붙도록 칭찬해대던 똑똑한 제자들이 장성입구의 찻집에서 김 모락모락 올리는 커피를 들이키며, 지난밤 북경의 나이트 클럽에서 눈이 맞았던 처자에 대한 환담과 그 처자와의 명랑 미래 계획으로 열을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찻집 안의 그 누구도 자기네의 모국어를 알아을 수 없으리라는 믿음으로 떠벌대는 그들의 언행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오오, 순간 나는 그 조교, 그 스테미너가 넘치는 교수를 따라 또 다른 정상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죽도록 불행한 조교로 인해 슬픔이 다시 복받혔다고 고백해야 하리. 마치 개장수에게 끌려가는 개처럼 코를 한 발이나 빠뜨리고 걸어가던 조교의 처연한 뒷모습이여.)
어쩌면 저 젊은이들에게 이 여행은 학술답사가 아니라 탐험이라든가 정신적 정복 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아주 소심한 나는, 세상의 학생들이여 각성하라, ‘一寸光陰 不可輕이요, 少年以老 學難成이라’고 성현께서는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리해서 어느 세월에 학문을 이루고 인간으로 성숙하겠는가, 허허허,라고 군자연하며 혼잣말했고, 찻집의 물을 심하게 흐려놓고 있는 그들이 결코 알아 볼 수 없도록 조심스럽게 눈을 흘겼고, 또 그들의 지나친 젊음을 탓했다.
2. 경극을 보다
어쨋든, 시간은 없고 할 일은 많았다. 나는 자리를 분분히 떨치고 일어나 어럅게 예약해 둔 경극 공연에 늦지 않으려 꽃단장을 서둘렀다.
장안대극원까지 가는 길은 북새통이었다. 자금성 광장에서는 올림픽 개최년 도래를 축하하는 쑈가 벌어지고 있었고, ‘프렌치의 복수’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는 새 콘서트 홀에서는 개관 기념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재미난 이야기 하나 하자. 프랑스 건축가가 설계하고 건축한 이 콘서트 홀은 온통 유리로만 지어졌는데, 이 건물에 대한 북경 시민의 반응이 아주 재미있다. “봄, 가을로 한 해에 두 번 씩만 닦는대도 도대체 얼마의 돈이 필요하단 말인가?”였단다. 지리적으로 먼지가 많고, 재개발과 산업화로 온갖 공해까지 가세한 북경시에서 유리 건물이란 거의 매일 청소를 해 주지 않으면 청결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사실은 그 프렌치 건축가만 빼고,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었을 게다. 그럼에도 그 건축가는 굳이 유리 건물을 지었고, 재미나게도 프랑스인들이 20세기 최악의 실패작이라고 말하는 루브르 박물관 유리 피라미드 입구의 설계자가 중국계 프렌치라는 사실을 입수한 유머감각 만점의 북경시민들은, 이 콘서트 홀을 ‘프렌치의 복수’라고 명명하기 시작했던 것.)
장안대극원은 텅 비어 있었다. 비시즌인 관계도 작용했겠지만, 서구문화의 유입 속에 경쟁력, 혹은 상품가치라는 이름 아래 아주 작고 낡은 것들이 소멸해 가는 풍경의 한 자락인듯 해서 괜시리 슬퍼졌다.
옛날, 초목을 떠르르 물리는 권세 높은 당 간부들이나 테이블을 차지할 수 있었다던 대극원. 그곳에 놓인 테이블 하나하나에는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역사의 손때들이 묻어 있을진저, 나는 그 박달의 결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온기를 느꼈다. 어여쁜 접대원이 과자와 차를 테이블로 날라주었고, 나는 차가운 속을 뜨거운 차로 달래며 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갑자기 암전, 그리고 극이 시작되었다. 아름답게 분장한 여인이 예의 그 특징적인 고음으로 꾀꼬리처럼 노래하며 나비처럼 사뿐히 춤을 추었다.
세상에나, 대륙 최고의 가수들이 모여있다는 그 대극원의 맨 앞 줄 테이블에 앉아 내가 경극을 감상하다니,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그런데 왠일, 한 가닥 부끄러움 같은 것이 가슴 속에서 슬며시 고개를 쳐들고 있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이봐, 판소리는 한 번이나 구경해봤던거야? 라는 자각이었던 것.
그랬다. 솔직히 나는 판소리 한 마당 구경해 보지 못한 우리 문외한이었다. 그럼에도, 시즌마다 나다니는 오페라 구경에, 가부키에, 경극 공연까지 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오호 통재라, 나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홧홧, 타올랐다.
내가 아직도 한국에 살던 그 시절, 우리의 전통문화는 공설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민속놀이 경연대회라든가 광주 씩이나 가애 볼 수 있는 춘향 선발대회라든가, 기껏해야 교육방송에서나 만날 수 있는 아주 희소적이어서 찾기 힘들고, 저부가적이어서 아부도 찾지 않는 문화상품이었다. 돈이 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을까. 방송국과 공연장에서는 우리의 전통 음악을 헌 짚신짝 내버리듯 팽개쳤고,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갔다.
학력고사 준비용으로 제망매가와 처용가를 해석하고 용어비어천가를 외웠으며, 심청가와 흥보가를 집중분석했지만, 정작 그것들을 직접 보고, 듣고,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우리에게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 부모님의 눈을 피해 가끔씩 보던 ‘국악의 항연’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판소리를 극 형식으로 꾸며 녹화해 두었다가, 일주일에 한 번 씩 KBS에서 방송해주던 그 프로그램은 어린 눈에도 재미있어서 한 주간 특별히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아이가 국악 프로를 청취하다니 좀 특별했던 것(?) 아니냐고 묻고 싶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짜로, 정말로, 진실로, 우리는 그 프로를 사랑했다. 그럼에도, 홑 이불 사이로 방귀 새나가듯 그렇게 스리슬쩍 그 프로가 사라져 버린 이후로 지금까지 국악은 정규방송 시간대에 편성되지 못하고 있으며, 국악 콘서트는 가뭄에 콩나듯 하는 판에 서양악 콘서트 풍년인 시대가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다.
남자 주연을 단골로 하던 꽃미남 조상현 씨의 호탕한 음성과 여자 주연 단골의 오정숙 씨가 들려주던 비단폭을 찢는 듯 아름다운 음성이나 김호연 씨의 매력적인 비음, 게다가 영원한 풍악잽이 이은관 씨의 신명이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아마도, 아주 어린 나이임에도 ‘우리의 색과 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의 배아가 아주 깊은 곳에서 자라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3. ‘황색 그림자’의 의미
전혜린은 그의 수필집에서 이렇게 말했다.
“짙은 안개를 들이 마시면서 나는 파란 하늘을 그리워 했다. 감나무나 대추 나무를 꿈에 그렸다. 사실로 내가 그리워 한 것은 ‘황색 그림자’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감상이나 미학적인 어떤 음탄이 아니었다.”고.
경박한 감상도 아니며, 값싼 미학적 음탄도 아닌 그 ‘황색의 그림자’란 바로 한국인의 정신의 색이요, 영혼의 물결일터. 그것은 아마도 태어나기도 전부터 모태 속에서 들어 오던 낮익은 음색과 가락과 색상들을 통해 내 정신 속에 각인된 골 깊은 무늬이며 청한 색이 아니겠는가. 나는 묻는다. 우리는 왜 우리의 음과 색을 우리의 아이들에게 들려주지 않는가, 라고.
나는 오늘도 북경의 한 구석, 대극원에 음산하게 쭈그려 앉아 식어빠진 찻잔을 기울이며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 다음에 한국을 방문한다면 꼭 판소리 한 마당 구경하고 오리라고 다짐 비슷한 것도 해 본다.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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