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에서… / 최형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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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도 향기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오븐에서 갓 구워 나온 빵 내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요즘처럼 찬 바람이 불고 겨울비도 자주 내려 기분이 울적하다 싶어지는 날이면 나는 일부러 부엌에서 빵이나 과자를 굽는다. 그리고 오븐에서 따뜻하게 빵이나 과자가 부풀어 오르며 구워지는 신선한 내음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갓 구워져 나온 따뜻한 빵을 먹으면 ‘그래, 이제 한번 살아봐야겠다’ 하는 삶의 의지가 충전되고는 하기 때문이다.
버터와 올리브 오일에 마늘을 갈아 넣고 파마산 치즈 가루와 말린 파슬리, 바질 가루를 적당히 섞어 빵에 바른 후 굽는 마늘 빵, 달콤한 것이 그리울 때면 빵 반죽을 홍두깨로 사정없이 밀고 나서 계피가루와 흑설탕을 뿌리고 돌돌 말아 잘라 구운 후 달콤한 크림치즈 아이싱을 끼얹어 먹는 시나몬롤, 어릴 때부터 먹었어도 질리지 않는 곰보빵과 호두과자, 닭살처럼 쭉쭉 찢어지는 하얗고 부드러운 솜살식빵, 파티나 생일이면 내가 만드는 과일 생크림 쉬폰 케이크, 신선한 마스카라폰 치즈와 진한 에스프레소가 잘 어우러진 티라미스, 고소한 수플레 크림 치즈 케이크, 그리고 향긋하고 진한 커피…이렇게 행복은 오븐에서 구워지는 고소하고 따뜻한 빵 내음과 커피 내음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사랑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 향기로…슬픔은 피워 올린 향 냄새로 나에게 다가오고는 한다. 멀리서도 알 수 있는 아릿한 이별의 내음…
종갓집 맏며느리로 평생 일년에 수도 없이 제사를 치러야 했던 친정 엄마는 요리를 참 잘했는데, 그래서인지 나의 입맛은 늘 예전의 미각에 주파수가 맞추어져 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제대로 만든 음식을 좋아하는 것도, 그래서 결국 밥의 노예가 되어 내 신세 내가 들볶으며 인생의 많은 세월을 부엌에서 보내는 것도 아마 오랫동안 길들여진 이 불가항력적인 미각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꿋꿋이 버티며 낙천적으로 살아가는 것도 어쩌면 나의 잔뼈를 굵게 해 준 이 ‘밥의 힘’ 때문이라는 생각과, 사랑이 담긴 음식을 먹고 자란 사람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삶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잘 견디어 나가리라는 나름대로의 실낱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사회적으로 인정 받지도, 가사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해도 나는 그리고 세상의 많은 주부들은 묵묵히 가족을 위해 따뜻한 밥상을 차리고, 뒷설거지를 한다.
그리고 자기의 이야기와 향기를 지니고 있는 식재료들은 부엌에서 나에게 그들만의 이야기를 수줍게 들려 주고는 한다. 말린 미역을 물에 담그면 미역은 그리웠다는 듯이 마른 몸 속 혼자 오래도록 꼭꼭 감추어 두었던 바다의 추억들과 짭짤한 갯내음을 풀어 내고, 산나물은 고개 들어 바라보던 하늘과 외롭던 산 이야기를, 이른 봄나물은 축축한 흙의 습기와 어린 풀 향기, 기나긴 겨울 동안 꾸었던 아련한 봄의 꿈들을 소근거린다. 그리고 살아서 버둥거리다 커다란 찜통에서 발갛게 익은 바닷게는 불가마 사우나의 비극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곳은 너무 너무 습했고 뜨거웠노라고…
어쨌거나…빵집을 밖에서 들여다 보기만 해도 행복해졌던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집 부엌에서 빵을 만들고 구울 때면 나는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고는 하는데,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빵의 치명적인 점은 바로 먹은 만큼 쪄 오르는 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는 게 뭐 별건가? 지상의 빵 한 조각에서 천국을 느낄 수 있다면…내가 좋아하는 가수 양희은씨가 자신의 묘비명을 ‘지가 한 밥이 맛있다고 그렇게 먹더니…’로 정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참 웃었는데…그렇다면, 나는 나의 묘비명을 ‘지가 구운 빵이 맛있다고 그렇게 먹더니…’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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