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의 도시 베이징을 가다-4
-황금의 성에서 찾은 보물은 무엇이었나(하)
4. 역사 앞에 서면 한 없이 작아지는 우리
이 지점에서 갑자기 386세대 이야기를 좀 하자. 386 세대, 우리들은 시대 혹은 역사가 만들어낸 기형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엊그제 만나 사준 라면덮밥 한 그릇의 인심에 아이같이 웃던 착한 후배가 내일 홀연히 사라져버리거나, 밥 인심, 술 인심 최고에 시인같은 분위기를 철철 흘리고 다니며 후배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선배가 짭새로 밝혀지던 시절. 바야흐로 세간의 인심은 바닥에 떨어지고 인간의 정리는 깃털보다 가볍던 시대 속에서, 그랬다, 우리는 젊음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개떡같은 세상 공부는 뭣에 쓰려 하냐고 몇몇은 강의실은 떨치고 거리로 뛰어나갔고, 그들을 따라나설 만큼의 기개와 배짱조차 없던 소심한 축들은 먹자골목에서 낮술을 찔끔거리거나, 낙원다방 어두운 의자에 구겨져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같은 시를 웅얼웅얼 읊조리며 의미도 없이 시간을 뭉개었다.
그 시절 그리고 그후로도 오랫동안, 우리는 공부에는 눈꼽만큼의 관심도 없이 잿밥에만 마음을 빼앗긴80년대 학번, 속칭 386을 자칭하며 왜곡된 역사의 수레 바퀴가 탁,하고 토해낸 불행한 세대로서 하나의 철학적 동질감을 공유하는 집단을 형성했다. 그뿐이랴. 동일한 시대정신 속에서 성숙하고 비슷한 시대정신을 공유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은 정신적 유사성 또한 갖추고 있었던 바, 그 중 하나가 바로 역사에 대한 과도한 자의식일 것이다.
386 세대의 끄트머리에 데롱데롱 메달려 역사라는 단어 앞에만 서면 지금도 주눅이 드는 나와, 나의 과 동기들은 87년, 어느 겨울의 끄트머리 수업을 빼먹고 떼거리로 고궁을 찾아나섰더란다. 웬일? 국문학도는 한국학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전방위적으로 커버해야한다는 반전문가적 학술 풍토가 성행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속칭 ‘땡땡이’치러 가는 우리의 행위에조차 왠지 모를 국학적 아우라가 풀풀 풍기기까지 했었던 것같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말이다, 그날 마주한 눈 덮힌 창덕궁, 그 도도한 자태의 돈화문 안으로 성큼 한 발을 내디디면서 느꼈던 이상한 감정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조선 왕조 500년의 희노애락애오욕을 한 어깨에 걸머 쥐고 의연히 서있던 건결한 돈화문을 지날 때, 왕성의 입구 좌우로 열지어 서 있던 잘생긴 홰나무, 괴수(槐樹)라 불리우는 그 푸르고 준엄한 존재를 박공의 눈으로 올려다 볼 때마다 느끼던 그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말이다. 어디 그 뿐이랴. 회색으로 가라앉은 화강암의 금천교를 지날 때, 철부지 어린 나이임에도 골수에 사무쳐 오던 그 온갖 회한은 또 어떠했던가.
아마도 그것은, 무한한 존재 앞에서 한 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의 본능적 수치심이었을 것이다.
수 천 년을 한 곳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살아가는 산신령 같은 홰나무와 달나라 항아 처럼 고아한 돈화문 앞에서 역사의 염결함, 그 비길 수 없는 도저함을 보아버린 우리들은, 백발이 성성하도록 산댔자 한 백년을 못 다 살 인간으로서의 한계 비슷한 것을 느꼈던 것일테고 유독, 역사 앞에만 서면 한 없이 작아지고 민감해지는 이상한 감수성의 정체를 알아버린 우리들은 그날 이심전심, 염화미소의 하루를 보내지 않았던가 싶다.
그랬다. 역사란 그런 것이었다. 세상 그 어느 기고만장한 인간이든 볼품없고, 초라하고, 남루하게 만들어버리고야 마는 것, 그리하여 터무니 없는 시건방짐으로 욱일승천하는 영장류의 자의식에 숨구멍을 트고 겸손이라는 미덕을 가르치는 그것 말이다.
어쨋든, 역사에 대해 지지리도 과민성 증상을 보이는 386세대인 나는 자금성을 통해 그저 거대한 건축물이 아니라, 역사적 은유로서의 ‘황금의 성’을 발견하고 싶었다.
과장없이 침묵 속에 조용히 부복하고, 어떤 형태로든 인간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자금성말이다.
5. 우물을 향해 목청껏 외쳐라
치국의 도를 학습하던 황태자의 고서 조각도, 3황후 9비들이 섬섬옥수로 타던 비파 줄 한 가닥도 발견할 수 없이 황폐한 궁들 사이로 수많은 싸구려 커피숍과 간이 식당들이 마치 ‘선데이서울’처럼 쌓여 있는 황금의 성 안. 그것을 바라보는 일은 눈물겨웠다.
무엇이든 날려버릴 기세로 불어대는 바람 속을 헤치며 황금의 성을 헤메다 발견한 작은 우물 하나. 나는, 노란 방한 파카를 단체로 맞추어 입은 서울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 싸고 서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우물(서시가 태후가 된 후에 황제가 사랑하던 애첩-韓族의 여인이었다는 소문이 있다-을 빠뜨려 죽였다는 우물)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한참을 서있었다. 고만하고 가지, 나도 구경 좀 하게. 그곳을 아주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던 노란 파카들이 몰려 나가기를 기다리며 나는 저 멀리 손톱만하게 보이는 우물을 망연자실 내려다보며 도달한 생각 한자락. ‘어쩌면 역사란 저 검은 우물 같은 것이 아닐까.’
우물을 향해 소리쳐 보라. 우물은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지 가장 솔직히 들려줄테니. 그 어떠한 잡음도 없는 이 울림통에 대고 소리치면 누구든 자신의 가장 솔직하고 깨끗한 공명음을 들을 수 있나니, 우물은 세상 잡음에 왜곡된 음성이 아닌 순수한 음성 그 자체를 돌려준다는 말이다.
자고 일어나면 홀라당 바뀌어 있는 세상, 그 절대적인 유동성이 낳은 강박과 불안과 피로, 파시즘적인 삶의 속도감, 세계 자본주의가 생산해낸 끊임없는 결핍 속에서 쫓기듯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역사라는 우물에 대고 힘껏 외쳐본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진실하고 왜곡되지 않은 우리 삶의 진실을 알려줄 것이다.
그대, 정신을 풍요롭게 하고 영혼을 살찌울 관조와 사색이 끼어들 한치의 틈이 없는 악다귀 같은 삶의 참 모습을 보고 싶다면 역사라는 우물에 물어보면 될 터. 우리는 과연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과거의 실수를 또 저지르는 우매한 짓을 하지는 않는가, 라고 역사에, 우물에 대고 소리쳐 보라.
6. 역사-신생의 모태
얼마만이냐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십여 년 만에 강렬한 곳이다
강렬한 이 경건성! 이것은 나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을 내 벅찬 가슴은 벌써 알고 있다
<중략>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
라고, 노래한 고은의 시처럼 인간과 세계는 역사를 통해 신생한다.
내 생각에 가장 훌륭한 리얼리즘은 이도 저도 아니라 바로 역사가 아닌가 싶다. 역사라는 리얼리즘은 언제나 인간의 ‘또 태어나는 일’ 즉, 신생의 모태가 된다. 과거가 뱉어내는 미래라니, 약간 심하게 문학적이긴 하지만 그것은 역사를 통해 배우고 창조하는 인간의 지향성을 가르쳐주는 가장 적절한 명명법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언젠가말이다, 기념품 가게가 된 황태자의 경연장과 식당으로 탈바꿈한 비들의 궁 또한 역사의 한 자락이 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미래의 사람들은 자금성이라는 역사를 통해 어떤 진실을 배울까. 나는 그것이 참으로 궁금하다.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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