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라의 절경이라고 하는 Al-Khazneh. 바위벽을 조각해 만든 이 걸작품은 1세기 나바티안 왕국의 Aretas 왕 III의 무덤이다국의 Aretas 왕 III의 무덤이다.
요르단: 역사의 파노라마 페트라
얼마 전 어느 신문에서 한국인 작가 김아타씨가 찍은 뉴욕 타임스퀘어 사진 한 장이 수 십만불에 팔렸다는 감동적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 기사를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사진에 대한 해설이 준 영감 때문이다.
이 사진 에는 신기하게도 그 번화한 뉴욕 시가의 바삐 움직이는 행인들과 자동차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시가지가 텅비어 있고 덩그러니 건물들만 죽은 듯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영 허전하기가 이를 데 없다.
이 작품은 작가가 현장에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특수 장치를 통해 8시간 이상 셔터를 열어 놓는 방법으로 찍은 것이라 하는데, 신비롭게도 사진에는 움직이는 것들은 다 사라지고 희미하게 안개같은 흔적으로만 조금 나타나 보일 뿐이다. 해설자는 이 사진 끝에“시간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져 버린다는 토를 붙여 놓고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이 중 하나라고 하는 요르단 남서부의 페트라(Petra)를 방문 하면서 나는 꼭 김아타씨의 사진을 생각했다. 걸어서 부지런히 일 주일을 다녀야만 다 볼 수 있다는 이 거대한 고대 유물 바위촌 페트라. 현재 그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제외한다고 해도, 지난 2천 년동안 이 곳에 수많은 문명 도시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고 지나 다녔을 지를 생각해봤다.
그런데 그 사람들 그 무리들의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그날 거기서 우리를 맞이한 것들은 우뚝선 바위벽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트라의 바위 벽들은 뉴욕 거리의 빌딩 숲들과는 달리 하나 하나가 저마다 할 이야기와 깊은 사연을 가진 살아있는 얼굴처럼 느껴지는 게 왠 일인가?
페트라는 희랍말로 “바위”라는 뜻이다. 애굽을 탈출한 후 요르단 중부 평원 왕의 대로를 통과하지 못하고 서편 변경을 통해 북쪽으로 향하던 모세가 갈증에 목이 탄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바위를 쳐 물을 낸 곳도 여기라고 한다.
붐비는 관광객을 피해 조금 늦게 페트라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빨리 움직여야만 해지기 전에 돌아 올 수 있다는 안내자의 말에 따라 바삐 서둘러 길을 나섰다. 몸에 썬텐을 바르고 여유있게 물병을 준비하는 등 단단히 차리고 나선 우리는 마치 여기 어딘가에서 모세의 발자국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호기심과 기대를 가지고 앞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불과 두어 시간 만에 우리는 돌밭 광야 바위틈 사이에서 몸과 마음이 한계상황에 이른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옆을 지나며 계속 나귀택시를 타라고 하는 베두인들(그곳 산 주의에 사는 원주민들)의 유혹을 뿌리치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모세를 향해“우리를 왜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고생을 시키냐”고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했다.
페트라는 한마디로 돌 산에 잠겨진 문화 박물관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당시는 물론이고 그 훨씬 이전부터 기원 후 로마제국의 식민지 시대 및 그 후 이슬람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 토착문명과 유럽의 기독교문화 및 이 지역 마지막 지배자인 이슬람의 흔적이 한꺼번에 겹쳐있는 소중한 문화재인데, 그 동안 수 차례에 걸친 지진으로 무너져 돌 무더기 속에 파묻혀 있다가 1812년 스위스의 한 탐험가에 의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곳에는 구약에 언급되는 호리족속(창14: 6; 36:20; 신2:12)과 에서의 후손인 에돔족속이 살았으며, 또 로마 제국이 서기 106년 침공하여 함락하기까지 오랫 동안 나바티안족 (Nabataean)이 문명도시를 이루며 살던 곳이다. 이들은 바로 낙타를 끌고 사막지대를 오가며 무역을 하던 사람들이며 베두인족의 조상들이다.
그러면 물이 없는 사막산 바위촌에서 이들은 어떻게 도시를 이루며 살 수 있었 을까? 우리가 가는 곳 마다 아직도 발굴작업이 한창이지만 일부 나타난 것 만 가지고도 2천년 전의 이곳 토착민들이 얼마나 지혜로운 민족인지를 짐작하게 해 주었다.
페트라 입구 양옆으로 늘어선 바위벽 사이 긴 통로(Sig)를 통과하는 동안 우리는 우측 벽 머리 높이쯤을 따라 설치된 수천년 된 도자기 수도관을 볼 수 있었다. 땅에서 나는 물이 없었던 나바티안들에게 일년 중 우기에 집중적으로 내리는 빗물은 더 없이 중요한 생명수였다. 저들은 바위벽 곳곳에 작은 물 저장고를 만들고 그렇게 모은 물을 이 수도관을 통해서 동네 곳곳에 공급할 정도의 높은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 텍사스 A&M 대학 출신으로 유창한 영어로 우리를 안내한 요르단인 안내원은 특별히 나바티안족의 이런 우수성을 강조하는 대목에서는 신이나서 목소리를 높이는 눈치였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이 기원전 4세기부터 무역의 요충지인 이곳을 확보하기 위해서 공격을 했으나 나바티안들은 거의 3백여년 동안 저들을 격퇴하며 당당히 이 지역을 지켜나갔고, 오히려 한때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며 서쪽으로는 로마와 동으로는 중국에까지 무역의 길을 넓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저들은 로마의 무력 앞에 손을 들게 되는데 그 이후로도 나바티안 문화는 희랍의 문화와 조화를 이루며 계속 발전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무역로 의 변경으로 이 지역은 역사무대에서 사라진다.
페트라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은 바위굴이다. 물론 웅장한 모습의 로마원형 경기장 과 극장 또 원주민들의 신전 및 로마인들이 세운 비잔틴 교회 예배당 등 많은 유적지들이 돌 무더기 속에서 차츰 발견이 되고 있지만, 가는 곳 마다 눈에 들어오는 대표적인 조각품은 바위 굴(Half-excavated caves)이다.
이들에게 바위굴은 생존시에는 가정의 거처와 예배 장소로, 또 죽은 다음에는 가족들의 시신을 모시는 무덤으로 쓰였다. 특히 아직도 웅장한 모습으로 든든히 서 있는 바위산 한 가운데의 궁궐과 같은 지배계층의 무덤들은 당시 저들의 문명이 얼마나 화려했을지를 짐작하게 해 주었다.
일 주일을 다녀야 다 볼 수 있다는 그 방대한 페트라를 단 하루 몇 시간 동안 서둘러 다니며 보려하니 무리하기가 짝이 없었다. 따라서 무덤 안을 가서 자세히 살펴 볼 기회가 없었는데,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일부 무덤 안 벽에는 크리스찬 들이 새겨 놓은 것으로 보이는 십자가들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로마인들이 그 무덤을 개조해 예배당 혹은 수도원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말을 들으며 순간적으로 나는 그 동안 돌산계곡 여기 저기 암벽에서 보며 지나쳐온 것들이 한꺼번에 겹쳐 떠오르며 끔찍한 생각이 느껴졌다. 벾 여기 저기서 본 것 중 하나는 다신교를 믿던 나바티안들이 새겨 놓은 자기 들의 토속신 상징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모슬림 교도들이 자기들 사원 꼭대기마다 걸어 놓은 초승달 상징이었다.
내가 보기에 이 바위 산들은 어쩌면 그 동안 수천 수 만년 동안 수 많은 지진과 비바람 심지어는 사람들의 전쟁까지도 감수하며 이렇게 그 자리에 의연히 서있어 왔다. 하지만 정작 이 곳을 거쳐간 그 사람들, 특히 저마다 자기 문명과 종교의 우수성을 과시하며 상대를 억압하고 죽이고 파괴하던 그 무리들은 다 어디 갔는가? 그 곳에 의연히 서 있는 그 바위들은 사람들이 여기 저기에 새겨놓은 그 흔적들 역사의 그 표시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를 생각해 봤다. 왠지 모르게 김아타씨의 사진이 머리에 다시 떠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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