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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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오래 서 있어서 그런지, 운동을 해서 그런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가서 그런지…점점 닭다리 모양으로 변해가는 나의 종아리를 보며 한숨 짓던 지난달의 어느 운 없던 날, 테니스를 치면서 공을 쫓다가 아주 어이없게 나는 오른쪽 다리를 다쳤다.
갑자기 걸을 수 없고 부어 오르는 다리를 끌고 병원에 가서 검진결과, 근육 파열로 다친 부위가 다 나으려면 목발을 한달 쯤 짚고 다녀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을 때의 암담함이란… 그나마 이만하길 다행이라며 위로했지만,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컸어도 엄마와 주부로서 나의 일상은 여전히 눈코 뜰새 없이 바쁘기만 한데…잦은 연말 모임에, 연휴에는 아이들이랑 스키 타러 가족여행도 계획했었는데…의지할 비빌 언덕 없는 이곳에서 가진 건 멀쩡한 몸뚱이 밖에 없는 나에게 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주부의 자리란 평소에는 그 존재감이 없지만, 부재하면 일상의 커다란 균열이 생기는 자리 아니던가…가정의 중심은 엄마이며 아내라는 것을 주부가 아프면 여지없이 실감하게 된다. 내가 하루만 손을 놓고 있어도 집안은 폭탄 맞은 모습으로 여기저기 빨랫감과 물건들이 뒹굴고, 싱크대에는 그릇들이 쌓이고, 아이들은 어딘지 풀이 죽어있고, 게다가 마당에서 기르는 개까지 평소보다 더 시끄럽게 짖어댄다.
집안만 엉망이 되던가…식구들의 건강에도 빨간 불이 켜진다. 몇 년 전에 병이 나서 내가 요리를 못 했을 때, 아침에는 라면, 점심은 중국집에서 투고해온 매운 짬뽕을 먹고 급성 위경련으로 쓰러져 911에 실려간 적이 있는 남편은 이번에는 회사일과 집안일로 피로했는지 감기로 고생을 했다.
내 존재의 집인 육체도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니,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자유로이 돌아 다니던 나날들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감사할 일이었는지 새삼스러웠고, 불편한 나를 위해 문을 열어주는 사람들의 작은 친절에 고마웠었다.
그리고 목발을 짚는 동안, 잊고 살았던 사람들이 떠 올랐다. 자기처럼 소아마비로 잘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고쳐주고 싶다며 나중에 크면 의사가 되겠다던, 어린 시절 한 동네 소꿉친구 정임이, 그녀는 그 오랜 꿈을 이루었을까 … 장애와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늘 밝고 씩씩해서 주위 사람들을 환하게 웃게 만들던 대학교 은사 장영희 교수님, 화장품 모델 같은 미모에 부자, 변호사로 많은 것을 가졌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평생 휠체어를 타야 하는, 하지만 당당하고 건강하던 백인엄마…내가 알고 있는 그들은 모두들 씩씩하고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자신만의 고통과 슬픔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세상을 향해 밝게 웃을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아픈 다리로 그렇게 억지로 걸으려고 하지마. 다 나을 때까지 기다려...만져도 안 아플 때…그때 조금씩 걸어봐…아픈 다리로 걷고 싶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나에게 말하고는 했었다. 다친 건 순간이었지만 오래도록 아팠고, 걷지 못했던 동안, 어쩌면 마음의 상처도 몸의 상처처럼 다친 만큼, 꼭 그 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아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친 다리로는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하듯이, 마음을 다치게 한 사람에게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도 다가가지 못하니 말이다.
가끔씩 이렇게 몸에 고장이 나서 일상의 질서가 무너지면, 까맣게 잊으며 살았던 내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새록 새록 솟아난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다. 올해는 건강에도 신경 쓰고, 매일 영양제도 챙겨 먹고 그래야겠다.
기어 다니던 아이의 종아리가 튼튼해지고 다리에 힘이 올라서 자기 혼자 걸음마를 뗄 때의 기쁨도 이런 거겠지…이제 다시 걸을 수 있어서 나는 정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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