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꼭 지금 나의 딸 아이만 했을 때, 하얀 눈이 내린 골목길에서 동생들, 친구들과 온 종일 지치도록 눈싸움과 눈 장난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할머니는 밖이 얼마나 추우냐면서 주름진 따뜻한 손으로 차가운 나의 볼을 감싸고, 손이 아주 꽁꽁 얼었다면서 작은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시고는 하셨다. 옛날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해진다면서도 자꾸만 조르는 나에게 들려주던 옛날 아주 먼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들고는 했던 아홉 살 겨울, 즐겁기만 하고 행복했던 유년의 날들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매캐한 최루탄이 터지고 간간히 학교 유리창문이 박살 나고는 했던 열 아홉의 겨울에 나는 시를 썼었다. 생살에 굵은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아픔으로만 다가오던 청춘의 시간들……아마 내가 지금도 시를 쓰지 못하는 이유는 젊은 날들의 그 기억 때문일 것이다.
백일 된 첫 아이를 놔두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스물 아홉 겨울, 나는 육체적인 고통이 정신을 망가뜨릴 수 있음을 깨달았었다. 누운 채 창 밖으로 보이는 키 큰 나무들의 흔들리는 나무 가지들을 바라보며 그때만큼 높은 나무를 흔들어대는 바람처럼 그렇게 자유롭게 떠돌고 싶었던 적이 있었을까……
며칠 전 오랫동안 벼르던 예전 사진 정리를 했다. 필름으로 찍어서 현상 했던 그 많은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잊고 지냈던 지난 세월의 추억들이 아련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누워있던 아이는 목을 가누고 있었고, 어느 날부터인가 환하게 웃으며 아장거리며 걸어 다니고 있었고, 사진들 속의 나는 한결같이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사진 속 나의 아이들이 자라나는 꼭 그만큼 사진 속 나의 젊음은 시들어 가고 있었다.
이십 대 청춘의 자유도 버거웠지만, 집에 갇혀서 가사노동과 육아에 몸과 마음이 지쳐갔던 삼십 대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는 것은 얼마나 많은 인내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던가……나 자신이 깨지고 부서지고 아파야 비로소 그 틈새로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난다는 것을 깨닫기 전 어느 추운 겨울날, 새장 밖으로 날아가버린 기르던 새가 가엾기 보다는 돌아와서 작은 새장에 다시는 갇히지 말라고, 자유롭게 푸른 하늘을 날아가라고 나는 바랬었다.
그리고……올해도 나는 남편과 마주 앉아 도 닦는 마음으로 열 두 번째의 김장을 했다. 배추 두 박스에 동치미 무 두 박스……젊은 새댁이 김장 서른 번만 하면 할머니가 된다고 했던가.
채워놓으면 일주일도 안되어 비기 시작하는 냉장고와 국이건 찌개이건 가득 끓여 놓아도 다음날이면 바닥을 보이는 커다란 냄비를 보며 한숨짓는 주부로서의 단조롭고 갇힌 일상 속에서 서른 아홉 살 나는 아직도 꿈을 꾼다.
내 안에 있는 그림자, 내 안에 있는 여자, 내 안에 있는 사랑……멀고 아득하기만 한 손에 잡히지 않는 나의 꿈들은 눈에 보이는 형체를 지니고 현실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아우성을 친다. 여러 다양한 인생을 잠깐씩 살아내는 배우처럼, 그 꿈들 속에서 나는 집시가 되어 혼자 낯선 거리를 헤매면서 절절히 외로워 해보기도 하고 사랑을 하기도 하면서, 부엌에서 나는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닭을 튀기고, 돼지고기를 삶는다.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도 길어져서 이제는 육 십대에 죽으면 요절했다는 소리를 듣는 세상일지라도, 서른과 마흔은 분명 느낌이 다르다.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헤매던 열 아홉, 스물 아홉과는 달리 서른 아홉이 되니 이렇게 평온해진 것을 보면, 절반의 생을 살아내어 그 무엇에도 혹하지 않는다는 불혹의 마흔은 젊음 보다는 분명 연륜에 가까운 나이인가보다. 그래도, 여기 미국 나이로는 아직 삼십 대라고 우기면서 한해 더 서른의 잔치를 즐겨보고 싶은 이 마음은 또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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