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건국한지 7년이 지난 1398년 8월26일 밤.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거병을 했다. 다음날 새벽, 상황을 장악한 이방원은 측근인 이숙번을 시켜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을 데리고 오도록 명했다.
조준은 본래부터 이방원 지지자였다. 그가 불우하게 지내던 시절 ‘대학연의’라는 책을 건네주며 장래를 준비할 것을 권했던 장본인이다. 하지만 이숙번이 찾아왔을 때 조준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택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준은 방안에서 선택을 놓고 점을 치고 있었다고 조선실록은 전한다.
어쨌든 조준은 이방원에게 줄을 서기로 했다. 거사는 결국 성공했으며 조준은 선택의 대가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왕조시대에 누구 뒤에 줄을 서는가는 종종 목숨이 오가는 절체절명의 문제였다. 줄을 확실히 선 결과 누대에 걸쳐 영화를 누린 또 다른 대표적 인물은 한명회이다. 수양대군의 거사를 가능하게 해 준 1등 공신 한명회는 안평대군의 책사인 이현로에게서 참여를 권유받았다. 당시 안평대군은 조정 실세 김종서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수양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수양을 만나 본 한명회는 그를 택했다.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 이 줄서기 도박은 성공해 한명회에게 ‘대박’을 안겨줬다.
줄서기는 인간사회에서 자연스런 현상이다. 과거 왕조시대처럼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은 더 이상 없지만 줄서기는 힘의 관계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사라질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줄서기와 아부가 싫으면 은둔을 택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은둔은 거의 불가능하다. 상하관계를 본질로 하는 직장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에서도 구성원들 간에 권력 관계가 형성된다. 이런 세속적 관계에서 자유로워야 마땅한 종교 조직에서도 줄서기는 예외가 없다.
줄서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때가 대통령 선거이다. 대권은 무수한 이권과 정치인들의 생사여탈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금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됐을 때 일부 국회의원들은 중립을 표방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이들은 특정 후보 쪽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든 줄을 서지 않으면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 것이다.
최근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BBK 의혹에 대해 검찰이 면죄부를 주자 연예인들과 경제인들, 그리고 사회단체 등 그동안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이 후보에게 경쟁적으로 줄을 서는 꼴불견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 주류회사는 며칠 전 일간지들에 “열둘보다 나은 둘도 있소”라는 제목의 술 광고를 게재했다. 누가 봐도 기호 12번 이회창 후보가 아닌 2번 이명박 후보를 지지해 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광고이다. 대단히 교묘한 방식의 줄서기라 할 수 있다.
줄서기에도 ‘투자의 법칙’이 적용된다. 위험이 대단히 높은 상황에서 줄을 섰을 때는 수익이 크지만 확실한 상황에서의 줄 대기는 별로 높은 수익을 기대하기 힘들다. BBK를 이유로 이명박 후보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이었던 박근혜 전 대표와 그의 측근들의 정치적 장래를 낙관할 수만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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