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 칼럼 / 한명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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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은 <동의보감>에서 그 기운에 따라 물을 33가지로 구분했다. 새벽에 제일 먼저 길은 우물물인 정화수, 봄에 내린 빗물인 춘우수, 가을에 내린 이슬인 추로수, 대한 무렵에 내린 눈을 녹인 물 납설수, 겨울에 내린 서리인 동상, 멀리서 흘러온 강물인 천리수, 순하게 흐르는 물인 순류수, 역류하는 물인 역류수, 급하게 흐르는 물인 급류수, 끓인 물과 찬물을 절반씩 섞은 생숙탕(음양탕), 황토를 가라앉히고 위에 뜨는 물인 지장수, 외에도 한천수, 국화수, 박, 하빙, 방제수, 매우수, 반천하수, 옥유수, 모옥누수, 옥정수, 벽해수, 감란수, 온천수, 냉천수, 장수, 요수, 열탕, 마비탕, 조사탕, 증기수, 동기상한, 취탕이다. 자연 중에 가장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 물이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인공적인 분수대가 물을 일순간 위로 치솟게 할 수는 있지만 이내 자신의 본성을 따라 낮은 데로 흘러간다. 겸손의 덕성을 본다. 아래서 위로 솟구치는 간헐천의 물도 결국에는 아래로 떨어진다. 물은 장애물이 가로놓이면 싸우지 않는다. 돌아갈 수 있으면 좌우로 피해 가고 아니면 장애물을 전신으로 뒤덮어버린다. 언제나 낮은 곳을 지향하는 물은 한 순간 강한 장애에 부딪혀 약간 솟구치기도 하지만 이내 물보라가 되어 흩어져 흐르는 물줄기에 흡수된다. 돌출된 부분이 나오면 다투지 않고 갈라져 흐른다. 장애물을 감싸 안음으로 극복한다. 화목의 힘이다.
물은 누구에게나 잡힐 듯하지만 결코 잡히지 않는다. 어떤 그릇에 담아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그릇에 맞게 변형시킨다. 탁월한 적응력이다. 모든 물들을 받아들이는 바다에게서 포용성을 보게 된다. 더러운 물도 받아들이고 보잘 것 없는 물줄기라고 해서 거절하는 법이 없다. 물은 그릇에 자기를 수용시킨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물이 세상의 모든 그릇들을 수용한다. 물은 세상의 모든 색에 자신을 내맡긴다. 자신을 수용하는, 그리고 자신이 수용하는 그릇의 색에 따라 자신을 비춘다. 물은 형체가 없지도 않고 있지도 않다. 물은 천만가지의 형체를 지니고 있다. 물은 정지하지 않는다. 고여 있는 물은 썩는다. 물은 끊임없이 움직여 살아있음을 과시한다.
법정스님의 <오두막집>에는 깊은 산 속에서 발원한 물이 산골짜기를 지나고 폭포를 지나 세상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서 흐르다 사막을 만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사막 너머에는 종착지인 바닷물이 넘실거린다. 물은 사막으로 힘차게 돌진했지만 이내 모래에 빨려들어간다. 출렁이는 바닷물을 보면서도 합류할 길이 없다. 고민 중에 한 목소리가 들린다. “네 자신을 증발시켜 바람에 네 몸을 맡겨라. 바람은 사막 저편에서 너를 비로 뿌려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다시 강물이 되어 바다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깊은 산 속의 물은 이렇게 해서 대양의 일부분을 이룬다. 물의 생명은 변화다. 필요에 따라 자신을 풀어버리면 기체가 되고 다시 매듭을 지으면 고체가 된다. 물은 긴장과 이완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긴장하면 얼음덩어리가 되고 이완이 되면 수증기가 되어 날아간다. 긴장과 이완이라는 두 축의 중심에 액체인 물의 상태가 있다. 그러므로 물로부터 관찰자는 중용 정신, 밸런스, 변화, 귀속성 등과 같은 삶의 원리를 캐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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