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틀에 갇히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도
있는 그대로의 세상은 연기(緣起)하지 존재(存在)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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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고
<내것>이라 할만한 것도 없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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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부처임을 알고 부처의 업을 지으며 살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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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떡을 준다 해도 선뜻 꼼지락거리기 싫은 일요일 오후. 명곡이라 해도 줄창 듣기엔 너무 긴 4시간, 아니 그 이상. 게다가 겨울의 도래를 선포하듯 쌀쌀맞고 험상궂은 날씨.
그래도 120석가량 되는 강의실은 가운데 앞 스무예닐곱 자리를 빼고는 거의 찼다.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 웃음장단을 맞추고, 노트에다 쪽지에다 받아적고, 쫑긋 세운 두 귀로도 모자라 녹음기에다 저장하고…. 대개 마흔 쉰 예순 넘은 ‘지긋한 학생들’은 학창 시절에도 그랬을까 싶게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했다. 한국의 대표적 불교학자인 전남대 철학과 이중표 교수(조지아 메이슨대 방문교수)의 ‘근본불교 교리강좌’ 둘째마당은 중간휴식 뒤 이 교수가 말한 대로 “바깥날씨가 참 추운데 여러분 열기 때문에” 후끈했다.
2일 오후 2시 조금 넘어 시작된 강의가 예정된 시간을 훨씬 넘겨 6시 40분쯤 끝났지만 열기는 한 웅큼도 식지 않았다. 냉큼 발길을 돌리지 못한 불자들 열댓명은 이 교수를 따라 팔로알토 이윤우 법사 자택으로 몰려들었다. 밥상을 물린 뒤에도 연장강의는 계속돼 밤 10시쯤에야 쉼표 같은 마침표를 찍었다.
한마디로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첫날(11월25일) 강좌의 서두를 질문으로 열었듯이, 이중표 교수는 둘째마당 역시 누구나 아는 듯하면서도 아무나 알지 못하는 잘못된 상식에 대한 경계용 내지 교정용 질문으로 시동을 걸었다. 기도나 신통력으로 물 속에 가라앉은 돌을 뜨게 할 수도, 물 위에 뜬 가랑잎을 가라앉게 할 수도 없다는 부처님 가르침의 예화가 뒤따랐다. 부처님의 45년 가르침을 4시간(이윤우 법사댁 연장강의까지 합치면 7시간 남짓)에 강의한다는 게 어렵다면서도 이 교수는 당대의 예화나 요즘의 행태를 들어 불교와 부처님에 대한 종교화 신비화 신격화 경향에 거듭 선을 그었다.
“막연히 깨달아서 도인이 됐다, 도인이 돼서 온갖 신통력을 부렸다, 우리도 도를 닦아서 그렇게 되자, 이러면…제가 아는 부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이 교수가 강조한 부처님은 “진리를 깨닫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분”이었다.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우리를 대신해 깨달아주는 이도, 우리의 업장을 대신 소멸해주는 이도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건, 부처님 부처님 하지만 실은 우리 모두가 이미 부처였다.
“부처는 부처노릇 하니까 부처님이고 중생은 중생노릇 하니까 중생이여, 천하에 쉬운 거여. 그런데 부처(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부처노릇 하기가 어려운 것이여.” 왜일까. 세계를 바로 보지 못하고 언뜻 바로 봤더라도 중생의 업에 이끌려 자꾸 딴짓을 하기 때문이었다. 세계를 바로 본다는 건 무엇인가. 그 해답 역시 너무 쉬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거여.”
이를 위해 부처님이 제시한 길이 중도였다. 퀴퀴한 정치인도 얍삽한 야바위꾼도 걸핏하면 입에 올리는 중도란 말인가. 저급한 뜻풀이에 불과한 그런 어중간한 길이 아니었다. 유학에서 말하는 중용도 아니었다. “언어의 틀을 벗어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도입니다.” 이 교수는 또 “있는 그대로”를 강조했다. 중도는 눈뜨임을 위한 길이자 눈뜨임 자체이기도 했다.
도대체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단 말인가. 그랬다. “언어에 갇혀 있어요. 지가 세상을 만들어놓고 그 속에 빠져 사는 거여.그러니 한방에서 잠을 자도 한 세계에서는 못살아요.” 이 교수는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이 따로 실재한다고 믿고 언어를 통해 세상을 분별하려는 행위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간단하게 증명했다. “부시맨 영화 봤어요? 그 부시맨들이 콜라병을 콜라병으로 봤나요? 또 부시맨의 세계에는 책상도 없어요…또 봅시다. 산과 들이 이어져 있는데, 어디까지가 산이고 어디부터가 들입니까.”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 교수는 웃었다. “농사짓는 사람은 밭 있는 데부터 들이라고 할 것이고, 나무하는 사람은 나무 있는 데부터 산이라고 할 것이고…” 산과 들, 너무나 다르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어서 어디까지 산이고 어디부터 들인지 의심해볼 생각조차 안해본 이들에게 철석같은 믿음의 허망함을 입증한 이 교수는 다시금 언어로 포장된 세계의 불완전성, 즉 모순구조를 드러낸 뒤 이었다. “무명이 딴 거 아니여,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 실제 이 세상은 모순구조가 없다 이거여. 모든 문제들은 언어에 갇혀있는 상태, 이것이 견(見)이요 무명이요 생사여.”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 세계를 본다는 건 언어에 갇힌 “견(見)을 알아내고 견(見)을 없애는 것”이라고 이 교수는 정의했다. 그렇다면 견을 걷어낸 세계의 실상은? “세상은 연기(緣起)하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이겁니다.” 상즉상입(相卽相入), 즉 우주만물은 예외없이 서로 연관돼 있고 변화하는 것이지 그 어느 것도 만고불변 상수일 수 없다는 것이다. 알아듣기 쉽게 어느 드라마 인기대사를 빗대 “네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네가 있다”는 말로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촛불을 예로 들어 “촛불은 (심지가 있고 불을 붙이고 등) 어떤 인연이 갖춰지니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 “그런 현상이 있으니 촛불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본래 촛불이란 없는 것”이라는 보충설명도 곁들였다. 자세히 관찰하면 심지에 들러붙은 불은 없지만 촛불이라고 부르는 현상은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연기하고 있는 상태’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은 막연히 텅 비었다거나 허무가 아니라 바로 이런 상태를 이른다는 것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런 촛불이 타면서 발생시킨 이산화탄소와 나무의 관계로 만물의 상호연관성을 더욱 굳게 설명했다.
우주만물의 연관성과 변화성을 꿰뚫어본 이상 부처님이 그 어디에도 <나>라고 할만한 실체가 없음(無我)을 체득한 것은 당연했고, 내가 없는 이상 내 것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고(無我所), 내가 옳다고 할만한 것도 없다(無我執)는 것 또한 일부러 눈 비비지 않아도 자연히 확연히 보이는 것이었다. 이 교수는 이 대목에서 “무아가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나를 회복,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참다운 나는 “작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업보로서 존재”하고 “명사로서가 아니라 동사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부처와 중생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노릇(업)을 하면 부처가 되고 중생노릇을 하면 중생이 된다는 원리 그대로다. 따라서 “업에 의해 의식이 변화하면 곧 윤회이니, 윤회나 생사해탈은 죽은 뒤에 맛보는 것이 아니라 현생에서 맛보는 것”이다.
6근, 6입처, 12연기, 12입처, 오(취)온의 개념과 작동원리 등을 두루 설명한 이 교수는 “보는 나도 보이는 놈도, 듣는 나도 소리내는 놈도 실체가 없으니 오온이 공한 것이요…생로병사는 자기존재를 취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망상덩어리”라는 데 굵직한 방점을 찍었다.
그런데 부처님이 깨달음을 증득한 뒤 보리수 아래서 일어나 45년동안 걸식하면서 가르침을 펼친 까닭은? 남달리 동정심이 넘쳐서도 유달리 원족설법을 취미로 삼은 것도 아니었다. 마땅히 할 일이었다. 왜?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았는데, 너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 아니던가. 말미에 이 교수는 “오늘 강의 듣고 ‘아하’ 했으면 된 거여, 그걸로 깨달은 거여”라고 ‘부처로서 살아가기’의 중요성을 화들짝 일깨우면서 살짝 덧붙였다. “그런데 뭘 밖에서 더 깨달을라 그래요.” 아하. 아들이 죽었다고 슬피 울던 여인이 부처님 한 말씀에 아하 깨닫고 돌아간 뒤에 다시 딸 죽었다고 찾아와 울고불고 했다는 기록은 없다. 거꾸로, 환한 낯으로 돌아서는 그 여인을 부처님이 돌려세워 죽은 소에 풀 먹이는 아들을 보고 아하 하고 깨달은 어느 효자 얘기도 듣고 가라는 등 그 많은 나머지 법문들을 다 들려줬다는 얘기도 없다. 이 교수 말대로 한번 아하 하면 그걸로 끝이다. 밤새 온갖 악몽에 시달리다 한번 눈을 뜨면 악몽은 그걸로 끝이지, 꿈 깰 때 그 순간 악몽만 끝이고 초저녁에 꾼 악몽은 그대로 남는 게 아니다. “본래 부처인 줄 알고 부처로서, 부처의 업을 지으며 살아가라”는 것이 이중표 교수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끝>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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