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화의 문화산책
거짓말, 그 인간 의식의 야행성에 대하여
1. 탈근대 사회의 틈새-거짓말
고(故) 이규호 교수는 그의 유고집 <거짓말, 참말 그리고 침묵>에서 “언어와 사물,그리고 생각 사이에는 3종의 틈새가 생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모든 언어는 부득이하게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언뜻 보아도, 서구 근대철학의 기반라 할 수 있는 ‘사물과 언어의 일대 일 대응 관계’에 대한 확신과 합리주의 전통을 전복한 탈근대 사상의 대표주자인 프랑스의 철학자 라깡이 말한 바, ‘가로축과 세로축’의 공식을 퍽이나 닮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탈근대 사회의 다원주의적 사유에 언어 철학적 기반이 되는 라깡의 이론은, 언어와 사물은 이미 합리주의적 1:1 대응 관계의 틀을 벗어나, 마치 팬텀처럼, 다양하고 중층적인 세계 속을 부유하며 새로운 짝을 찾아 헤메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어떠한 짝패 관계도 일시적이며 상대적인 것일 뿐, 항구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결국, 이러한 논거에 기대본다면 탈근대를 살아가는 고기토들에게 ‘진실’ 혹은 ‘담론의 진정성’에 대한 회의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언어가 무엇인가. 라깡이 말한 바, 그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인 것. 그러므로 언어가 없다면 인간의 정신은 무엇으로 사유하며, 또한 무엇으로 발현될 것인가. 언어란 인간의 정신이요, 사물이란 세계이며, 생각이란 사유의 방식을 지칭한다 했을 때, 이규호의 말대로 이들 사이에 3 종의 틈새가 이미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 혹은 진정성이란 말장난에 불과한 공염불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했을 때, 이규호의 말, “모든 언어는 부득이하게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진정 진실(?)이 되고도 남을 진저.
2. 거짓말 그리고 <너의 의미>
김영하의 <너의 의미>는 거짓말 같은 인간의 삶, 혹은 삶의 틈새를 빼곡하게 메운 비진정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너의 의미> 속에는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는 수위의 진지한(?) 거짓말로 가득한 세계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군상의 허위와 거짓말로 점철된 삶이 존재한다.
충무로를 팔며 살아가는 삼류 감독과 어린 소설가의 사랑이란 얼마나 상투적이고 신파적인가. 창조성은 넘치나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 삼류로 늙어가는 자칭 천재 의 모멸감이 만들어 낸 거짓말들, 그리고 남에게 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거짓말로 도배한 ‘나’의 막판 인생을 향한 철딱서니 없는 어린 소설가의 더 무서운 거짓말과 허위의식. 어쩌면 신문 사회면 가십란이나 채울 법한 그렇고 그런 스토리처럼 보인다.
‘나’는 삼류 감독이다. ‘나’는 충무로에서의 별 볼 일 없는 이력을 배경 삼아 신인들의 싸구려 뮤직 비디오나 찍어 용돈을 벌거나, 모델 지망생과 배우 지망생들에게 출연을 조건으로 몸이나 탐하는 ‘이류’도 아닌 ‘삼류’다.
‘나’는 어쩌다 그럴듯한 이야기라도 하나 건져 충무로로 입봉해 볼 심산으로 철없는 조윤숙을 만나게 됐지만, 시간이 갈수록 ‘조윤숙’으로부터 풍겨오는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다.
급기야, 싫어 죽겠다는 ‘내’게 사랑한다며 죽기 살기로 메달려 울고 부는 조윤숙에게 ‘나’는 거짓말로 미화했던 과거지사를 고백해버리고 만다.
너는 나의 정체를 아직 모른다, 나는 그저 한심한 충무로 낭인일 뿐이다, 그저 신인들의 뮤직 비디오나 찍을 뿐이며, 너에게서 바라는 것이라곤 쓸만한 시나리오 하나 건지는 일 뿐이다, 등등.
그럼에도 조윤숙은 고백까지 해버린 ‘나’를 두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비운의 천재’ 운운하며 ‘나’에 대한 사랑에는 흔들림이 없음을 천명한다.
이런! ‘운명적인 사랑’이라니, 만난지 한 달도 안된데다, 그것도 일 때문에 몇 번 만나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하다 사라진 남자를 두고 말이다.
마침내, ‘나’는 조윤숙이 등단했다는 그 소설을 읽어보게 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조윤숙은 바로 자신의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을 흉내내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과거를 연료 삼아 현재를 도모하며, 거짓말과 진실을 착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족이라 손 치더라도 이것은 해도 너무 한 것이 아닌가.
조윤숙은 현실과 소설, 진실과 거짓말을 혼돈하고, 그 사이를 제 집 담 넘나들 듯이 하고 있었던 것. 자신의 거짓말에 스스로 속아 무언가에 열정이 팍,하고 꽂히면, 조윤숙에게는 세상만사가 분홍빛으로 보이는 법.
그렇게 구축된 거짓말의 세계에서 진실이란 한갖 낯선 세상이자 왜곡된 만화경일 뿐인 것. 조윤숙이 만들어 낸 거짓말의 세계에는 그 어떤 진실도 틈입할 틈새가 없다.
쥐똥보다도 더 자잘한 거짓말들이 모여 영화처럼 아름답지도 않고, 폼 나지도 않고, 진지하지도 않은 그녀의 삶을 하나의 명품, 사랑의 세레나데로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조윤숙에게 소름 돋은 맨살이나 일상의 너절한 넝마들 같은 진실이란 결코 필요치 않은 항목일 터.
오오, 무서워라. 조윤숙은 ‘나’에게 공포영화 속 연쇄 살인마보다도 천 배는 더 두려운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랴.
3.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껌보다도 집요한 진실
11월 25일 자 워싱턴 포스트 지에 의하면 서로 아는 두 사람이 10 분간 대화를 하면서 평균 2-3개의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어쩌면 그것은 프로이드가 말했던 바 ‘인간 의식의 야행성’의 일종이 아닐까. 대명천지, 눈부신 햇살 아래서 대면하는 까칠한 현실보다는 약간은 어둡고 습하지만 거짓말과 꿈과 허위 속에서 더 안정감을 느끼는 이 못 말릴 퇴행 심리 말이다. 그리고 이 퇴행 심리는 그 자체로 인간 의식의 부조리에 대한 시니컬한 응답이 아니겠는가.
우리 삶이란 언제나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길거나 짧거나 말이다. “오늘은 어제 죽은 자가 그토록 열망하던 바로 그 내일”이며 내일은 내게 남겨진 날들 중의 첫날이라고 누군가 쉴 새 없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 누군가에게 살 떨리도록 소중할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이 규호의 말처럼, 그 좁히기 힘든 ‘3 종의 틈새’라는 종합 선물 세트 이름을 닮은 깊고 깊은 간극 속에 발목을 담그거나, 너무나 쉽게 약간의 퇴행 심리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나 자신에게 준엄하게 질문해 볼 일이다.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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