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철과 박태원과 이상과 랭보를 동시에 읽던 어느날
우리 시대의 글쓰기
1.
최수철. 속칭 58년 개띠, 강원 춘천 출생. 여기까지만 본다면 최수철의 프로필은 그리 현대적인 것들과는 인연이 있을 법해 보이지 않는다. ‘강원도’라든가 ‘춘천’라는 단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탓도 있으려니와 국문학자인 부친의 탓으로 일찍 개안하게 된 국문학(그 시절 잘나가던 영문학이나 불문학도 아닌)에 의 이른 매혹이라든가, 오랜 세월 밥벌이 안되는 시인을 꿈꿔 온 그의 청년 시절이 또한 그러하다.
이쯤되면, 사실 약간은 궁금해진다. 궁벽한 지방 소도시의 투박한 한 청년을 매끈한 현대주의자(어떤 의미에서는 후기 근대주의자이자 탈근대주의자이기도 한)로 탈퇴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사실이.
이 지점에서 그의 이력을 다시 들춰보지 않을 수 없다. 서울대 불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그러면 그렇지, 이 대목에 와서는 누구나가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서울대 불문학과. 그곳이 어디인가. 그곳에는 스타일리스트 김현이 있었고, <문학과 지성>이 있어, 온통 프랑크프르트 학파에게 점령당한 한국 문학계에 프랑스 철학과 후기 근대주의의 젖줄을 대고 있었던 곳이 아닌가. 최수철은 바로 이와 같은 곳에 탯줄을 묻고 글쓰기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2.
혹자들은 최의 글쓰기를 일러 ‘무정부주의적’이라고 평하는데, 특히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얼음의 도가니>가 더욱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무정부주의. 그것은 정부주의, 중앙집권제를 혐오하는 것. 문학 쟝르에서는 소설제도에 대한 부정과 일탈의 방식으로 재현된다.
최의 무정부주의적 기질은 고전적 소설 작법을 허물고 일종의 실험적 글쓰기를 통해 구현된다. 뭐, 물론, 어떻게 보자면 한국 근대문학의 실험 정신이라는 것이 이상 이래 한치의 진보도 이루지 못한 채 이상 흉내내기에 급급하다고 말한다면 , 약간 기분이 나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쨋든 이러한 한국문단의 현실을 차치하고라도 최의 글쓰기는 어느 정도 이 실험이라는 단어의 자장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최의 실험적이고 탈권력주의적인 글쓰기는 주로, 작가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무척 1930년대적인 근대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점은 최의 글쓰기 위에 박태원의 글쓰기를 오버 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3.
박태원. 주지하다시피 박은 1930년대 한국문단 최고의 모더니스트 중 한사람이었다. 너무나 유명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식민지 체제 하의 문단제도 속에서 피동적 글쓰기 기계로 전락한 작가에 대한 자기성찰을 그린 수작이며, 한국문단 최초의 무정부주의 소설이라 명명해도 될 것이다.
작가 이상이 식민지 고등실업자가 봉착한 반신불수의 삶과 권태를 글쓰기의 주제로 삼았다면, 박태원은 식민지 작가의 자의식과 글쓰기에 대한 성찰에 대해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 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시대의 반항아들이요, 예술과 이즘의 사생아들이자, 근대주의적 교육제도가 만들어낸 그야말로 뼛 속까지 근대주의자일 수밖에 없었던, 그러나 근대주의와 또한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근대주의자, 속칭 ‘먹물’들이었다.
4.
최수철은 어떠한가. 언급했듯 최는 언제나 무정부주의적 글쓰기의 현대적 아우라를 보여준다. 그는 고전적 소설작법을 거부하고 해체하는 방식을 통해 탈근대적인 글쓰기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묻는다. 최의 글쓰기가 소설구조를 해체하기에, 고전적 글쓰기 방법을 이탈하기에 그의 소설은 언제나 탈근대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그의 글쓰기에는 언제나 근대주의자들의 해묵은(식민시대 이래 한 100년은 되었음직한) 존재론적 성찰과 문제의식이 중심 화두로 떠오른다.
강원도 진평의 한 콘도미니엄에서 작업 중인 주인공 ‘나’의 문제의식이란, 작가로서 깨어있고자 하는 욕망, 자본의 논리로부터 자유인이고자 하는 욕망, 쇠약과 무기력으로부터 작가적 눈과 급소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 그러나 차츰 제도 속에 안주해 가는 자신을 망연자실 바라보는 순간의 난처함과 곤혹스러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머릿 속의 불을 ‘얼음의 도가니’ 즉, 차가운 이성의 틀에서 빼내어 진짜 ‘용광로’ 속에서 녹이고 구워 변태시키고자 하는, 죽지않는 이 질긴 욕망들.
사실, 최의 <얼음의 도가니> 속 주인공은 박태원의 거리를 방황하는 ‘산책자(fl neur)’모드에서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무척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상이 아달린을 한 움큼 삼키고 어두운 방구석을 뒹구는 것으로 악마의 시절에 반항했었다면, 박태원은 그 어둡던 악마의 시절의 핵심부인 거리로 나아가 ‘관찰’을 시작했다. 그것은 지식인, 작가가 부조리한 현실 속에 한 쪽 발목을 들여 놓는 일의 시발점이자 ‘관찰자’이자 세상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글쓰기의 시작이다.
<얼음의 도가니> 속, 최는 상업적 글쓰기와 더러운 전락을 상대로 외롭고 힌겨운 작은 전투를 벌이고 있다.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있는가. 지금 나는 자학을 하고 있구나.
모든 것이 늦어 버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요
컨대 나는 아무것에도 진정으로 닿으려 하지 않았고, 그 결과
로 아무것도 내게 제대로 닿을 수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런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얼음의 도가니> 중에서
항상, 현실이라는 달콤한 사탕발림에 끙끙거리는 ‘개’같은 인생이 아니라, 진정성과 진실을 바라보고 덤벼들 수 있는 ‘사자’같은 삶을 향해 포효하기를 주인공 ‘나’는 갈망한다. 어쨋든 이러한 모든 시도들로부터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편협한 자기만족과 과장된 자기 현시와 경박한 현실주의와의 야합임을 최는 잘 안다.
5.
그리고, 랭보를 생각한다.
19세기 유럽을 뒤흔든 반근대주의자 랭보를 생각해 보라. 철저히 근대주의의 세계를 받고 탄생한 랭보, 그럼에도 유럽의 이성중심주의를 비판한 랭보는 결국, 엉뚱한 제국주의자로 재탄생한다.
제국의 아들, 랭보라는 근대인은 자신의 근대적 시선에 포획된 처녀지를 탐험하고 엉뚱하게도 무기상이 되어 그 반이성의 처녀지를 유린한다. 그렇다. 랭보의 파리에 대한 비판과 환멸이 제 3 세계에 대한 존경과 인격화로 환치될 수 없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무기를 밀매하는 시인이라니, 이 얼마나 문학적 아이로니 가득한 풍자란 말인가.
“생명과 애정의 원천인 태양은, 환희로 넘실대는 대지 위에 사랑의 불길을 쏟아 붓는다. 사람은 골짜기에 몸을 눕히고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대지의 젊음과 용솟음치는 피, 생명으로 부풀어 오른 유방의 풍요로움, 神과도 같은 사랑과 女體와도 같은 나긋나긋함, 그리고 광선과 수액(樹液)으로 성숙하고, 모든 배아(胚芽)들의 큰 욱실거림이여!<태양과 육체;Soleil et chair>”라고 검은 대륙을 찬미한 랭보의 시선 속에 제 3 세계 원주민들의 모습은 없다. 그는 제국의 아들이었고, 아프리카는 식민지일 뿐이었으므로, 랭보의 그 칭송받는 근대비판은 제 3 세계에 있어 식민주의자의 농짓거리이거나, 기름기 좔좔 흐르는 대책없는 낭만주의 정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어찌, 이것이, 한 세기 전 유럽대륙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으리. 세상에는 수많은 작가와 시인과 예술가들이 탄생하고 사라진다.
이 수많은 작가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들 작가로서의 존재감은 과연 어디로부터,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21세기, 작가는 과연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랭보나 이상의 시대도, 박태원의 시대도 훌쩍 지나간 지금, 나는 생각해 본다. 작가의 참의미에 대하여, 그리고 <얼음의 도가니>에 대하여.
<정영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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