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에 나오는 표현으로 녹의황리(綠衣黃裏)라는 말이 있다. 첩에게 밀려난 본처가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는 구절에서 쓴 말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황금빛 색깔이 귀한 색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황제의 의복은 주로 황색으로 지었다. 황색은 정색(正色)인 반면 초록은 간색(間色)으로 천한 색 취급을 받았다.
녹의황리란 천한 초록색 옷을 지으면서 안감으로 귀한 황색을 쓴다는 의미이다. 귀천의 자리가 뒤바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집안의 안주인으로 귀한 자리를 차지해야 할 자신은 뒤로 밀려나고 엉뚱하게도 첩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면 본처로서는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하겠는가.
지난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 아닌 패배를 한 후 알 고어 전 부통령이 느꼈을 감정도 그 비슷했을 것 같다. 미국민들이 모아준 표로 보면 당연히 자신이 백악관의 주인인데, 미국 특유의 선거인단제도 때문에 조지 부시 현 대통령에게 자리를 넘겨주어야 했으니 그 속이 오죽했겠는가.
선거 이후 한동안 반 은둔생활을 했던 그는 이따금씩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몹시 살이 찐 모습으로 매스컴에 잡히곤 했었다.
그러던 그가 다시 매스컴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환경운동에 전념하면서 부터였다. 연방 의원 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환경문제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인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그에게는 인생의 황금기를 여는 열쇠가 되었다. 세답족백(洗踏足白)과 같은 효과이다.
세답족백이란 발로 밟으며 빨래를 했더니 발이 깨끗해지더란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불이나 담요 빨래는 큰 일이었다. 손으로 빨자니 너무 힘들고, 세탁기는 용량이 충분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주로 쓰던 방식이 발로 밟아가며 빠는 세탁법이었다.
옛날 식솔 많은 부잣집에서도 하인들을 시켜 발로 밟아 빨래를 하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하인이 빨래를 하다 보니 생각지 못한 결과를 얻게 되었다. 나와는 무관한 남의 빨래를 하느라고 했는데 다 하고 보니 자신의 발이 깨끗해지는 뜻밖의 이득이 돌아오는 것이다.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을 경고하느라 열심히 발로 뛴 고어가 요즘 누리는 명성과 영예가 바로 그렇다. 처음에는 인류에 대한 사명감으로 시작했겠지만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 제작 후 그는 ‘미스터 환경’이라는 스타 이미지를 얻더니 이번에는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7년 전 대선에서 패배할 때는 상상도 못했을 황금기가 그에게 도래한 것이다.
반면 당시 표를 적게 받고도 대통령에 뽑힌 행운아, 부시 현 대통령의 요즘은 썩 좋지가 않다. 무리하게 밀고 나간 이라크 전쟁에 발목이 잡혀서 돈은 천문학적으로 쏟아 부으면서도 이렇다 할 해결책은 안보이고, 기다리다 지친 민심은 등을 돌리고 자당인 공화당마저 거리를 두는 판국이다. 7년 사이에 ‘뜨는 고어, 지는 부시’가 되고 말았다.
결국 인생은 새옹지마 - 묵묵히 성실히 살아갈 뿐 오늘 잘 되었다고 크게 기뻐할 일도, 못 되었다고 크게 실망할 일도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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