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주의와 민족적 알레고리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제대로 읽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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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3세계의 언술행위-민족적 알레고리
일찌기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제 3 세계의 모든 문학은 ‘민족적 알레고리’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민족 정체성과 상상적 공동체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다시 말해 아무리 개인적 리비도로 가득 찬 작품이라 할지라도 제 3 세계의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공간을 재현, 투사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의 완곡한 해설법이다. 어쨋든, 제임슨의 이론에 의하면 제 3 세계의 모든 사적인 문학은 공적인 영역으로 재탄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인데, 우리는 이것을 일러 ‘민족적 알레고리’라 명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제국주의의 지배가 경제적이고도 문화적이며 더욱 간접적인 형태로 변모한, 이른바 자본주의의 전지구화 과정 속에서, 담론은 외부와 내부, 중심과 주변,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상호 연관성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변화에 따라 가장 핵심적인 개념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것이 바로 ‘타자성’이라는 개념이다.
타자성 혹은, 타자화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서구사회의 합리적 인식에 기반한 과학주의적인 근대 서사로부터의 주변화이자, 제 3자화를 의미하는 것. 이때, 세계와 권력의 중심인 서구의 근대 철학을 기반으로 한 근대적 대서사로부터 타자화된 주변부로서의 제 3 세계의 서사와 언술, 그것이 바로 ‘민족적 알레고리’의 기반이 되며, 이 타자성은 ‘다름’을 바탕으로 한 ‘민족적 알레고리’의 본질적 개념이 된다.
이 때, 이 ‘민족적 알레고리’는 하나의 전략으로서 서구의 모든 지배적 언술 방식과 글쓰기의 패턴을 부정하고, 제 3 세계의 인식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영역의 언술행위와 글쓰기로 변모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았을 때,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은 제임슨의 시선 즉, ‘민족적 알레고리’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내 이름은 빨강>의 무대가 되는 이스탄불은, 북쪽으로 흑해와 남쪽으로 에게해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의해 아시아와 유럽으로 나뉘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동서양 제국들에 의해 번갈아가며 점령당하거나 동서의 두 문명이 가장 격렬하게 부딪친 격렬한 각축장으로 존재해 왔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등에 업은 작가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문화와 정치가 대결하는 가장 첨예한 각축장으로서의 이스탄불을, 파묵 특유의 가장 원색적인 탈식민 언술행위로서의 ‘민족적 알레고리’ 즉, 또 다른 한 편의 세밀화로 재현하고 있다.
2. <내 이름은 빨강>-복고주의 속에 숨은 것들
2002년 프랑스 최우수 외국 문학상, 2003년 이탈리아 그란차네 카보우르 상, 2003년 인터내셔널 임팩 더블린 문학상, 그리고 2006년 노벨 문학상이라는 무척 화려한 이력을 가진 오르한 파묵의 글쓰기는 자신의 조국 터키와 이슬람 문화라는 이미저리와 결합해 서구적 글쓰기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 하나의 거대한 생소함으로 다가선다. 그러나 전복해 보면, 오히려 생소함은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소설의 특별함의 출발점이자 우리 자신 즉, 제 3 세계인들에게 잊혀지고 박탈당한 과거와 전통에 대한 새로운 조우를 예고하는 기분좋은 낯설음이 아닐까 싶다.
한마디로, <내 이름은 빨강>은 그 글쓰기 전략부터 무척 이색적이다. 각 장마다 각기 다른 인물의 시점에 따라 이야기를 서술하는 깃털처럼 자유로운 시점 이동, 작중 인물과 독자 간의 상호 소통 등, 파묵이 구사하는 모든 전략적 서사 방식은 서구의 근대적 글쓰기 방식 즉, 로만(Roman)에 입각한 순차적 글쓰기를 해체하고 고전적이고 설화적이며 구술적인 것으로서 근대 이전 즉, 전통적 서사양식에 훨씬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내 이름은 빨강>의 스토리 라인은 의외로 간단하다.
1591년 오스만 제국의 보석이라 명명되는 이스탄불의 겨울, 궁정 세밀화가가 살해되는 미스테리한 살인이 일어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한 가운데에 ‘카라’가 있다. ‘카라’는 세밀화가 ‘엘레강스’의 살해범을 찾아내는 비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이스탄불에 도착, ‘엘레강스’의 동료 세밀화가 ‘나비’, ‘황새’, ‘올리브’ 를 살해 용의자로 지목하여 수사를 펼쳐나간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러나, 살인자를 찾아내는 일 자체에 있지 않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히려, 숨막히는 수사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 즉, 이슬람의 전통적 세계관과 예술관에 대한 인식과 오스만 제국을 잠식하는 서구 문명과의 내적 투쟁에 대한 발굴에 있다.
<내 이름은 빨강> 속에서 ‘회화’란 단순한 예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당대 서구에서 밀려드는 근대적 화풍과 미학에 맞서 동양의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이슬람 세밀화가들의 투쟁이자, 원근법, 투사법 등에 구현된 서구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에 대항하는 동양의 정신과 철학의 각축장으로 재현된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에게는 너무나 낯선 방식으로 전개되는 감정의 흐름과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세큐레’를 향한 세밀화가들과 ‘카라’의 애정다툼이 놓여 있다.
3. 전략적 글쓰기와 역사주의
추리 소설 형식으로 전개되는 <내 이름은 빨강>은 언뜻 셜록 홈즈류의 영국식 추리 소설을 닮아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주 먼 곳에 위치해 있다. 소설은 이슬람식 사랑 해설서 같은가 하면, 세밀화 전서이자 문화 사전 같기도 하다. 또한, 마주 이국적인 애정 소설인가 하면 약간 난해한 탐정 소설 같기도 하고, 조잡한 철학서적 같기도 하다. 오르한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을 통해 추리소설이라는 서구적 글쓰기 방식을 차용하여 전통적이고 복고적인 글쓰기 전략을 통해 민족적 알레고리 즉, 그들만의 서사에 도달한다. 그것은 미철학 서적이자 탐정 소설이고, 애정 소설이자 탈식민 담론이다. <내 이름은 빨강>은 근대적 서사의 틀에서 깃털보다 가벼이 비상하여 자유롭게 쟝르를 넘나든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동서 문화의 각축장이 되었던 터키 작가 파묵이 동, 서양의 문화적 대비를 통해 도달한 터키적 정체성의 탐구와 발굴 작업이 제 3 세계의 예술가들의 글쓰기의 지평을 더욱 넓히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내 이름은 빨강> 속, 주된 배경이 되는 이스탄불의 풍경과 고전적 어법으로 묘사되는 복고적 이슬람 문화들 위에 모든 제 3 세계 국가의 풍경들이 겹쳐져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전통적이고 복고적인 글쓰기의 전략은 끊임없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함으로써 이슬람 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전방위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로즈마리 헤네시와 라자스와리 모한은 문화적 텍스트의 독해는 주체의 역사적 현존에서 ‘역사’를 이해하는 가능한 방법들로 이데올로기적 간섭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헤네시와 모한의 언급을 바탕으로 <내 이름은 빨강>을 독해해 본다면, 그것은 단순한 복고주의나 역사 낭만주의를 가볍게 넘어선 언술행위로서 서구적 글쓰기를 전복하는 탈식민적 언술행위이자, 주변부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 즉, 민족적 알레고리로서 명명하고 이해하는 또다른 책읽기의 지평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색다른 방식을 통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또 하나의 색다른 책읽기, 독해의 기쁨을 만끽해 보면 어떨까. 그 또한 무척 즐겁지 않겠는가.
<정영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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