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국 목사 칼럼 /새누리 선교회 담임
남동생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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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4일 나의 10년 아래 남동생이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45세라는 이른나이로 아내와 삼남매를 남긴채 그렇게 험했던 나그네 길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급히 서울로 나가서 동생의 장례식을 마무리 지으면서 나에겐 한가지 불안이 있었다.
그 한가지는 그의 영혼이었다.
1981년 8월 내가 남미 아르헨티나 선교사로 떠나던 김포공항에서 그는 내게 한마디 하였다. 형., 형이 김포공항 떠나는 즉시 나는 동사무소에 가서 형의 사망 신고 할거니까 그리알으라고---.그렇게 동생은 형도 교회도 떠나버리고 말았다.
나는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랐다. 그래서 내또래들은 너나 할것없이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다 농사꾼이 되었다.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서울로 유학 까지 가서 대학졸업을 하였다 그러나 그 난리통에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홀어머니와 동생 4남매가 나의 대학까지의 학업에 많이도 희생하였다. 이제 대학 졸업했으니 연노하신 어머니도 잘 모시고 동생들 뒷바라지도 하리라는 모두의 기대를 져 버리고 나는 선교사의 길을 떠났으니 동생의 처사에도 마음만 아팠다.
만 7년만에 한국에 나간날 나는 다시 동생을 찿았다.그는 나와 제수씨와 조카들은 교회에 데려다 주고 자기는 교회밖 차안에서 기다렸다. 내가 몇번 간곡하게 권했더니 또 한마디 하였다. 형., 내가 볼때 형이 목사다운 목사라고 여겨질때 그때 교회 나갈꺼니까 다시는 내 앞에서 교회 이야기 꺼내지 마.
그리고 또 10년이 지난 어느날 그는 형수에게 전화했다. 사업이 망해서 길바닥에 나와 앉게 되었으니 좀 도와 달라고--. 나의 아내는 그전화 받고 시동생에게 전세금을 보냈다. 그돈은 우리가 아르헨티나 11년 목회 를 마치고 북미로 청빙받아 떠날때 받았던 퇴직금 2만불이었다.아내는 나와 의논 한마디도 없이 집 살려고 했던 그돈을 몽땅 보냈었고 동생은 그 전세금을 받았던 그 일요일날 17년 만에 다시 교회를 나갔다. 그게 10여년전 이야기이다.
아직도 형은 목사다운 목사가 되지못하지만 동생은 형수님 때문에 형을 용서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온 것이리라.
지난 금요일 한밤중 에 서울서 걸려온 동생 부고 전화를 받았을 때 나의 첫 감정은 두려움과 불안이었다. 그 인생 마지막에 그는 그의 영혼을 어떻게 마무리 지었을까. 그 인생 마무리에 동생은 당뇨로 10여년 고생했고 대장암으로 투병하던 동생은 교회를 나갈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많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집안에 갖혀있던 동생에게 기독교 라디오와 TV를 통해 그영혼을 축복하셨다.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나기전 신부단장 을 아름답게 시키셨다.하나님은 목사 자격없는 형의 기도를 불쌍히 여기시고 동생을 천국으로 데려가셨다.
천국이 없다면 이 이별을 그 무었으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천국이 있기에 멀잕아 천국에서 동생을 다시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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