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무대에서 한미정상회담이 끝난 직후 기자회견을 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해괴한 외교 감각을 세계에 널리 확인시켰다.
노 대통령은 조지 부시 미 대통령에게 한반도 평화선언이나 종전선언에 대한 언급을 두 차례나 강하게 주문했다. 통역이 표현을 누그러뜨렸지만, 분위기는 금세 어색해졌고, 부시 대통령은 끝내 “전쟁을 끝낼 평화조약 체결 여부는 김정일에게 달려 있다”는 원칙론에 그쳤다.
외신이 부시 대통령의 얼굴에서 ‘화가 난 표정’을 읽어낼 정도로 퉁명스러운 반응이었다. 양국 관계자들은 이런 모습이 마찰이나 이견으로 비칠까 봐 ‘통역 실수’라고 얼버무렸지만 ‘사건’을 덮기에는 늦었다.
흔히 회담 내용을 간단히 언급하고, 듣기 좋은 말로 상대방을 치켜세움으로써 유대를 과시하는 정상회담 후의 공동기자회견이 이렇게 어색하게 끝나다 보니, 결코 작지 않았던 정상회담의 성과마저 빛이 바래버렸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검정 가능한 비핵화 조치를 성실하게 이행하면 한국전쟁을 종결시키는 평화협정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공동 서명할 수 있다고 밝히고, 내달 남북 정상회담에서 이런 뜻을 전해 달라고 노 대통령에게 요청했다. 대북 인식의 진전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컸지만, 결과적으로 공개 천명을 거부하는 모양이 되어 의미가 크게 줄었다.
이번 사건은 2004년 말 가고시마에서 열린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장면을 연상시켰다. 함께 모래찜질을 하기로 예정돼 있었으나 노 대통령은 일본식 욕의(浴衣)를 입은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 주기 싫다는 이유로 거부해 고이즈미 전 총리 혼자 모래찜질을 했다.
이런 고집이 국내 정치에서는 일부나마 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국제무대에서는 그저 이상하고 대책없는 대통령으로 비칠 뿐이다. 임기가 다 끝나가는데도 아직 이 모양인 대통령 때문에 국민이 느끼는 참담한 심정을 생각하면, “국민과 김 위원장이 듣고 싶어 한다”는 부시 대통령 압박의 이유도 “김 위원장에게 들려주고 싶어서”라는 말로 들리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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