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도 날 수 있다:Turtles Can Fly>와 전쟁에 대한 단상
1. 슬픈 아이들
중동의 영화들에는 이상하게도 아이들이 많이 등장한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로부터, <천국의 아이들>, <거울>, 그리고 바흐만 고바디의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과 최근작 <거북이도 날 수 있다>가 또한 그러하다.
너무 아프고 비루한 삶이기에 결코 영화로는 만들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장면들을 힘겹게 영화 속으로 이끌고 들어와, ‘겨우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슬픔을 전염시킴으로써 저 낡고 해묵은 고향, 우리들의 아픈 과거와 조우하게 한다.
<거북이도 날 수 있다:Turtles Can Fly>의 카메라는 마치 냉정한 자연주의자처럼 소외되고 발설되지 못한 어두운 곳의 이야기들을 샅샅이 드러내고 비추며 우리에게 질문을 퍼붓는다.
어쩌자고, 카메라는 약간의 거리감도 없이 인간의 죄의식을 환한 조명 아래 노출시키고, 아랍세계와 커디쉬 난민촌의 후미진 골목, 치유불가능한 상처와 죄의식을 낱낱이 드러내는가.
고바디와 키아로스타미 두 감독의 카메라가 동시에 아랍세계의 미로를 탐색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아이들의 시선에 포착된 세계를 주로 다룬다는 의미에서 그 둘은 같아 보이지만, 또한 서로 다르다.
그것은 바로, 바흐만 고바디의 앵글이 키아로스타미의 그것처럼 결코 따스할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은 아마 키아로스타미가 이란인임에 비해 고바디는, 제 3 세계인 아랍 세계 속에서조차 타자화된 커디쉬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커디쉬들이 그러하듯, 그에게는 국가라든가 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랜 세월 중동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며, 내몰리고 쫓기며 살해당하고 강간당해 왔다.
그러므로, 고바디의 영화 속 커디쉬 어린이들은 키아로스타미 영화 속의 아이들보다 더 높은 벼랑의 가파른 절벽 끝에 내몰려 있다.
2. 거북, 날다.
이라크 국경지역,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임박했다는 소문 속 크리스마스 이브의 커디쉬 난민촌을 배경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후세인의 핍박을 피해 수 많은 커디쉬 난민들이 몰려드는 난민촌에 두 팔이 없는 소년 ‘헨코브’와 여동생 ‘아그린’ 그리고, ‘리가’라는 어린 아이가 난민촌에 나타난다.
‘세틀라이트’라는 닉네임으로불리우는 13세의 소년 ‘소란’은 ‘아그린’을 보고 첫눈에 사랑을 느끼고,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 보지만, ‘아그린’은 언제난 영혼을 도둑맞은 채 껍데기만을 걸친 애늙이이처럼 어두움을 그림자처럼 질질 끌며 살아갈 뿐이다.
가족이 잔인하게 살해 당하는 현장에서 병사들에게 윤간당하였으며, 죄악의 씨앗을 잉태하고 또 낳음으로써 그녀는 이미 생의 환멸과 삶의 역겨움을 경험하고 말았던 것. ‘소란’이 ‘아그린’의 동생이라 생각했던 ‘리가’는 그녀의 동생이 아니라, 병사들의 윤간이 만들어낸 죄악의 씨앗 즉, ‘아그린’의 아들이었고, ‘아그린’은 ‘리가’라는 존재를 통해 전쟁과 살해와 겁탈을 매일처럼 되풀이하여 경험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리가’는 ‘아그린’에게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이자 결코 떼어낼 수 없는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다. 이쪽 편의 세상이 악몽이므로 ‘아그린’은 이쪽 편의 세상을 넘어선 곳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쪽 편의 세상을 이미 초월하여 저 너머에서 이편의 삶을 바라보는 ‘아그린’의 시선 속에 갖힌 생이란 구토이자, 경멸이고, 환멸이자, 비현실이다.
국경지대에 매설된 지뢰를 파내는 아이들, 그것을 팔아 일용할 하루의 양식을 마련하는 아이들, 한조각의 거친 빵을 위해 구걸을 하거나 채 여물지도 않은 자궁으로 저만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아이들.
그들의 아주 작은 몸에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은 찢기고, 검게 멍든 노쇠한 영혼일 뿐이다.
3. 세상의 모든 전쟁을 혐오하며
후세인 레짐이 몰락한 이후 제작된 최초의 이라크 필름인 <거북이도 날 수 있다>는 당연히 반전영화이다. 고바디의 반전 메세지는 아름다운 영상미 속에 더욱 깊은 슬픔과 반어적인 강렬함을 창조한다. 아름다운 아랍의 고원 속에 숨은 회색의 지뢰들, ‘아그린’이 자신의 아들을 익사시키고 자살하는 연못의 숨막히게 푸르른 색감, 지뢰에 부상한 ‘소란’의 다리로부터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잠자코 빨아들이는 대지의 선명한 황토빛, 그리고 검은 밤, 잠들 곳 없는 아이들을 적시는 그 투명하게 반짝이는 장대비.
이 모든 아름다움 속에서 전쟁 속에 방치되고 유기된 아이들의 슬픈 눈빛은 더욱 공허하다.
전쟁 속에 죽어가는 것이 어찌 병사들 뿐이랴.
여인들은 겁탈당하거나 과부가 되고, 아이들은 부모를 잃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가공할 포식성을 보이는 전쟁이라는 괴물의 잔인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그 어떠한 대의명분과 영광된 이름을 내건 것이라 하더라도, 전쟁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반인류적 행위임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전쟁을 경험한 이들에게 전쟁이란 가파른 언덕을 지나 저 너머에 있는 이샹항을 위한 것이라 말한다면, 땅끝으로 내몰린 이 아이들에게 전쟁이 쓸고 지나간 폐허에서 희망을 발견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한낱 말장난에 불과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 그 누구이겠는가.
<거북이도 날 수 있다>는 잴 수 없는 아득한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여주려는 계몽영화풍을 단호히 거부한다. 고바디에게 영화는 언제나 ‘현재’의 시제를 단 것이듯, 현재의 커디쉬 난민촌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도 억지로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그대신, 빈곤과 저개발과 시체와 굶주림과 겁탈과 살해 속에 버려진 아이들을 통해 전쟁이라는 행위의 맨얼굴을 들여다 보라고 우리에게 재촉한다.
초토화된 세계를 향해 열린 시선을 마주 대하며, 전쟁이 인간으로부터 노략질한 것들을 생각해 본다.
사랑과 평화와 관용과 화합, 이해와 용서 같은, 이제는 성서 속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그 단어들, 그리고 인류애라는 단어들을 말이다.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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