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우 법사(전 대불련 회장)
도올 김용옥 선생께서 집필한 사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금강경 강해>라는 책이 몇 년 전에 출판된 바 있다. 지금까지 천여 종의 금강경 해설서가 있어왔지만 계속해서 이렇게 해설서가 꼬리를 잇는 것은 누구도 신(信), 해(解), 행(行), 증(證)의 균형이 잘 어우러진 분이 희소하기 때문이다.
도올 선생은 물론 이해(解)가 뛰어난 당대의 대천재이시지만 불교에 대한 믿음과 수행과 증득함이 많다고 하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그 한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천재가 무슨 망설임이 있어 하고 싶은 말을 주저하겠는가.
거사장자(居士長子)들은 금강경을 복(福)경이라 하여 믿음과 그 과보로 생기는 복됨을 내용으로 삼는 해설이 많고, 학자들은 무아(無我)나 무상(無常)등의 날카로운 이론으로 금강경을 접근하며, 수행자들은 무상(無相)과 무주(無住)등으로 실천의지를 담아내는 해설을 주로 한다. 그것은 금강경이 그만큼 자비와 지혜와 복덕을 겸비한 경이기 때문이다.
도올 선생께서는 단호한 어조로 어초(語初)에 선언하신다. 금강경은 선(禪)이 아니다. 금강경을 선으로 접근하는 모든 주석을 나는 취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미도 자비와 희사를 통째로 내동댕이친 출가수행자들에 대한 야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곧 이어서 내설악산에 있는 백담사에서 조오현 스님과 대화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언급한 부분에서 선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현스님은 속초 신흥사 스님으로 시조시인으로 문명(文名)이 있는 분이다. 강원도에는 본사가 두 개 있는데 태백산맥을 동서로 하여 속초, 강릉 등지는 설악산의 신흥사가 관할하고 춘천, 원주 등지의 서쪽 강원도는 오대산의 월정사가 관할하고 있다.
요새는 웬만한 절의 주지만 되어도 큰스님이라 부르지만 원래 큰스님이란 승려로서 승려를 가르치는 분을 일컫는다. 나이가 드신 스님은 그냥 노스님이라고 하면 듣기 좋을텐데 큰스님이라고 굳이 부르는 것은 귀에 거슬린다. 또 회주스님이란 무엇인가. 주지라는 이름은 안 가지고 있지만 실질적인 오너를 지칭하는 것이라 우스운 이름이다. 사장님과 회장님의 관계가 바로 주지와 회주와의 관계다.
우리나라 불교가 좌선 때문에 망하고 있다거나 선원을 헐어버립시다 등등의 대화내용을 소개한 것은 그리될 리가 없음을 알면서도 한 언중유골(言中有骨)이다. 그러나 말은 버리고 뼈만 찾아내면 약이 될 것인즉 자비부재를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자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세속화를 거부하는 것이 산중선사들의 태도임을 우리는 꼭 알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비는 물론 주는 자비와 받는 자비가 다 포함된다. 받는 자비란 일신의 소망과 기도가 주된 내용이요 주는 자비는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말한다. 주는 것이던 받는 것이던 종교화된 자비를 달갑지 않은 눈으로 바로 보는 것이 불교의 기본인식이다.
어떤 종교의 어떤 자비행이나 은총이던 그것은 결국 무엇인가. 자기 종교의 선교행위 아니겠는가. 교세를 크게 넓히자는 안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세가 양심이 되는가. 큰 교세면 진리가 되는 것인가. 종교가 종교 목적으로 그칠 때에는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기업이나
사업과 다를 바 없다. 받는 자비도 천박하기는 마찬가지다. 간증이나 일삼는 얼빠진 신비주의자가 되기 때문이다. 무아나 무상과는 거리가 먼 정신의 도착상태인 것이다. 이런 연고로 진리운동만을 고집하는 불교의 전통은 인류의 사랑을 받는 영원한 스승인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믿음과 수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법(諸法, 모든 존재)이 법신(法身)임을 알아차리는데 두고 있는 것이다.
어떤 승려가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티 없는 부처님입니까’. 조주고불이 답하되 ‘숫처녀니라’. 다시 묻되 ‘중생이 무엇입니까?’ 답하되 ‘숫처녀가 잉태를 한 것이지. 물론 아기를 잉태한 처녀는 머지않아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기를 낳고 기른다는 것이 어찌 만신창이가 되지 않고 가능하겠는가. 천가지의 쓴 맛과 만가지의 괴로움을 당해야 할 일이다. 이러한 어머니의 애씀과 아픔을 위로해서 불교에서는 그를 보살님이라고 부른다. 자기는 없어지고 자식만이 있는 것이 청정보시요, 육신을 버려서라도 자식을 지켜내는 것이 지계며,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자식을 걱정하는 한결같음이 정진이다. 이 사바세계에서 육신보살은 어머니 뿐이다. 숫처녀로 임종하는 것은 선사적 몸짓이고 어머니가 되는 것은 보살적 몸짓이다. 도올 선생이 세상의 어머니를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당치 않은 일이라 꾸짖으며 모든 스님들이 보살이 되어야 한다는 비분강개는 현장 인식의 착오다. 대승보살 운동이 후대에 와서 선사 운동과 보살님 운동으로 분화된 역사적 사실을 잘 살펴보지 않는 아웃사이드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리라.
대승운동의 방법론인 육바라밀은 보시, 지계, 인욕의 장에서 보살님 운동으로 편입되고 선정과 지혜, 해탈은 선사 운동으로 자리를 잡았다. 다시 말하면 보살운동은 여성용으로, 선사운동은 남성용으로 변신되었다는 점이다.
원래로 세속은 여자의 몫이고 출세간의 몫은 남자의 일이다. 또한 세속은 이름을 묻지 않는다. 눈물의 바다에 이름이 무슨 소용이랴.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속을 떠난다는 출세간의 세계에서는 이름이 판을 친다. 명(名)을 다투는 것이 치열하다 못해 싸움판이 되는 추태도 역사상 많다. 효봉선사나 성철선사가 효봉보살, 성철보살로 바뀌어야 한국불교가 산다고 하지만 전혀 될 수 없는 일이다. 한국 스님들이 그러므로 지독한 소승이라고 탄식하는 것은 도올 선생의 엄청난 오해다.
<금강경 육조대사 구결>이라는 금강경 해설서에 장상영 거사는 말했다. 대승의 대(大)는 ‘홀로라도 존귀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지만 다만 탐진치를 따라 수레를 타기 때문에 승(乘)이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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