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올랜도>와 영화 <올랜도>에 나타난 혼종성에 대한 단상
1. 내 안에 함께 사는 남성과 여성
사상가 호미 바바는 근대사회의 혼종성(Hybridity)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그것은 어떠한 대상도 본질적이고 순수한 기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주체, 민족, 국가, 전통, 문화, 성별의 독자성과 본질성은 지배적 문화가 창조해 낸 허상이자 과장일 뿐 본질적인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시간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순차적으로 흐른다는 믿음 또한 이미 더 이상 보편적인 이론이 아니며, 인간이 여성성과 남성성 중 단 하나만을 타고 난다는 인식 또한 프로이드에 의해 부정된 채,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뒤죽박죽 뒤섞인 21세기식 탈현대적 시간개념이 근대적 주체의 3차원적 인식체계를 붕괴시키고,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젠더(Gender)’라는 개념으로 환치함으로써 우리는, ‘혼종성’ 혹은 ‘다양성’이 구성하는 다차원적 세계를 재차 확인하게 된다.
과연, 혹자의 말처럼 그러한 혼종성의 경험이란 현실과 가상 세계의 경계선을 지워버림으로써 존재를 위협하는 버츄어 리얼리티일 뿐인가?
시간과 종의 기원을 넘나들며, 본질이라 믿었던 그 모든 것을 파괴하고 ‘다시’ 쓰는 일이란, 부정받은 자들의 가슴 속에 감추어진, 기원이 오랜 ‘욕망’의 예술적 재현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우리는 <올랜도>를 통해 그 기원이 오랜 욕망과 예술적 재현을 실감한다.
소설 <올랜도>는 ‘빅토리아조의 치마를 두른 게릴라 전사’라 종종 명명되는 버지니아 울프가 감내하며 살아야 했던 불합리한 시대에 대한 고발이자, 욕망의 환타지아이며 혼종성과 다양성에 대한 지극히 아름다운 선언이다.
그리고, <탱고 레슨>, <피아노> 등으로 잘 알려진 호주의 여류 감독 샐리 포터가 영화화한 <올랜도>는 울프의 아방가르드와 극으로서의 브레히트적 기법을 접목, 실험성을 더한 수작으로 재탄생했다.
게다가, <올랜도>의 영화적 재현물에는 후반부에 20세기의 이야기를 첨가됨으로서, 울프의 이야기는 세기를 뒤어 넘어 더욱 현시대적 문제의식으로 탈바꿈 한다.
2. 올랜도 되기
<올랜도>는 아주 유쾌하다.
4백년이라는 세월 동안 남성에서 여성으로 진화(?)하며 살아 온 그/그녀에 대한 이야기인 <올랜도>는 종횡무진 시간을 넘나들고, 생리학적 성별을 넘나들고, 문화적이고 시대적인 편견과 억압을 넘나들며 혼종성 혹은 양성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혹은- Or’ 와 ‘그리고- And’를 혼효한 주인공의 이름(Or-l-and-o)에서부터 남성 이거나 여성인, 또는 남성이고 여성인 주인공의 혼종성이 잘 드러난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선언처럼,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사실, 여성성과 남성성을 나누고 금긋는 이분법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올랜도>를 통해 배우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경로는 울프의 알레고리와 포터의 재치로 인해 오히려 유쾌하고 깃털처럼 가볍다.
16세기 영국, 4세기에 걸친 수명을 누리게 될 올랜도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젊은 귀족이다. 미소년 올랜도는 러시아 공주 사샤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의 배신에 ‘사랑’의 불멸에 회의를 느끼며, 시인이 되고자 노력한다. 온갖 노력에도 결국 어쩔 수 없는 3류임을 깨달은 올랜도는 결국, 터키 대사라는 직분을 얻어 머나먼 이국의 나라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제국주의에 항거 하는 폭동이 일어나는 사이, 올랜도는 끝도 없는 깊은 잠에 빠지게 되고, 마침내 여성으로 재탄생한다.
이백년 간 죽음 같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난 성전환자(?) 올랜도는 이제, 발걸음조차 떼기 힘든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18세기 영국 사회의 억압적인 제도들과 대항해야 할 판이다. 남성 올랜도가 사망했으므로 여성 올랜도는 그 어떤 재산에 대한 소유권도 인정 받을 수 없었던 것. 그리고, 남성 판사와 남성 배심원으로 꾸며진 남성의 법에 의해 여성 올랜도는 귀족으로서 누렸던 모든 특권을 상실하게 된다.
19세기 빅토리아조의 어둠을 거치면서 올랜도의 양성적 혹은 혼종적 실험은 약간 속도를 잃는 듯하게 보이지만, 올랜도는 혁명가와의 사랑과 결혼은 통해 오히려 사랑과 결혼에 대한 진실에 도달한다.
그리고,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 올랜도는 드디어, 작가로 다시 태어난다. 이것은 <여성과 글쓰기>에서 엘렌 씨쑤가 말했던 ‘여성의 삶’과 ‘여성적 글쓰기’의 상관관계에 대한 영상적 재현으로 보인다.
<올랜도>에 나타나는 양성성 혹은 혼종성의 실험은 단일한 성 정체성으로서의 남성성 혹은 여성성이 지닌 한계성에 대한 해법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남성성 혹은 여성성이 아니라, 남성성 그리고 여성성의 양성적이고 혼종적인 다문화적이며 유토피아적 통합에 가까운 것이다.
3. 평등한 세상을 위하여
왜 이것 아니면 저것이어야만 하는가? 왜 남성성이 아니면, 여성성이, 여성성이 아니면 남성성이어야만 하는가? 그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은 헤게모니 투쟁에 가까운 종속이론을 생산할 뿐이다. 결국, 남성이, 혹은 여성이 단일자로서 타자를 억압하고 지배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랜도>는 각자의 욕망이, 서로 다른 두 성이 얼마나 다양한 색채를 지닐 수 있는가에 대한 본격적인 질문이자, ‘차이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한 편의 서사시처럼 보인다.
버지아니 울프와 샐리 포터는 동시에 남성성과 남성적 세계를 저격하는 저격수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이분법을 넘어서는 대안으로서의 혼종성, 결국, 차이에 대한 존중과 유토피아적 통합을 말하고 있다.
오해하지 말라. 이들의 혼종성, 양성성이란 트랜스 젠더나 바이 섹슈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양성적 문화의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것은 데카르트식의 ‘절대’라는 수식어를 동반한 개념어와 ‘진리의 빛은 찬란하되 그 폭력성은 가혹하도다!라는 근대세계의 파라독스를 가뿐하게 넘어서는 곳에서 반짝이는 하나의 빛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21세기를 맞이한 지도 벌써 10년이 가까와 온다.
이번 주말에는 <올랜도>를 감상하면서, 근대적 획일성의 철학에서 성큼 뛰쳐나와야 ‘차이의 정치학’을 인정하고, 혼종성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열어봄이 어떨까? 혹은 여전사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들을 읽으며 익어가는 여름과 여물어 가는 사상을 만끽해도 좋으리.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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