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락 기자의 다큐멘터리 ‘타운 50년’
“시장님, LA시의 한인인구가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약 8,000명 정도라는데 사실인가요?”
1975년 봄 양회직 7대 회장과 최초의 흑인 시장 탐 브래들리(작고)간의 대화는 계속됐다. “시청 문 앞이 한인사회인데 8만명이나 된다는 것을 모르시나요?”라는 양 회장의 직격탄에 브래들리 시장의 얼굴에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동석한 송정두, 윤병욱 부회장과 정태동 사무국장, 그리고 민병용, 이선주씨 등 당시 언론사 대표로 나온 관계자들도 양 회장의 예상치 못한 직설적인 화법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넘지 못할 높은 벽으로만 느껴졌던 LA시장과 한인회간의 첫 공식만남이 어렵게 성사된 마당에 자칫 좋지 못한 인상을 남기지나 않을까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75년말 싯가 30만달러 현건물 입주
LA시장실과 채널 커뮤니티 입지 커져
본국 정치상황에 한인사회도 분열
1976년 10월3일 ‘우정의 종’ 기증식에서 참석자들이 타종식을 갖고 있다. 오른쪽부터 존 페라로 LA시의회 의장, 탐 브래들리 시장, 한병기 주유엔대사, 한사람 건너 박상두 LA총영사.
1974년 11월16일과 17일 양일간에 걸쳐 실시된 7대회장 선거에는 역대 최대 규모인 3,500여명이 투표에 참가, 양회직씨를 차기 회장으로 선출했다. 양씨와 격돌했던 공학박사 출신의 최순달 후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대구공고 동기동창으로 훗날 귀국해 대기업 임원 등을 거친 뒤 체신부 장관을 지내게 된다.
1975년은 한인회에 큰 변화가 불어왔다.
양 회장은 취임직후 회관매입에 박차를 가해 10월8일 30만달러에 매입절차를 마무리 짓고 11월22일 감격의 개관식을 가졌다.
회관매입을 둘러싸고 많은 일화가 있었다.
양 회장에 따르면 그 당시 회관 건립위원회(위원장 소니아 석)가 있었으나 사실상은 부동산 업체들의 대리전 무대였다는 것. 위원중 조지 최 전 회장은 현재의 건물을, 석 여사는 윌셔가의 건물을, 상공회의소측에서 나온 인사는 7가와 알바라도 길의 건물을 제시하며 협의를 계속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취임 6개월내 회관마련을 공약했던 양 회장은 초조해 질 수 밖에 없었고, 특히 석 여사와 상의측이 제시한 건물은 100만달러가 넘는 고가여서 올림픽과 웨스턴길에 자리잡은 건물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결국 꾀를 내 당시 LA 총영사였던 박영씨에게 도움을 청한다. 어느날 석 여사와 양 회장을 베벌리힐스의 ‘래리’라는 스테이크 식당에 초청한 박 총영사는 즉석에서 건물을 보러 가자며 함께 현재의 한인회관 건물에 들어간 뒤 1층부터 4층까지 돌아보며 “뷰티풀”을 연발했다. 결국 석 여사는 자신의 뜻을 접고 이 건물을 매입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건물이 결정되고 에스크로에 들어가자 이번에는 또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3년전 조직됐다가 흐지부지됐던 1차 건립위의 위원장을 맡았던 김시면씨가 갑자기 에스크로 중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제출한 것. 위원장을 맡을 당시 5만달러 지원을 약속하며 2만달러를 먼저 냈던 김씨는 이 돈이 새 건물 건립을 위한 것이었다며 제동을 걸고 나온 것이다.
한인회는 발칵 뒤집혔고, 젊은 이사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김씨가 일주일만에 이를 취하하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
양 회장은 또 LA시장과 한인회간의 공식 채널을 열기도 했는데 당시 시장이 최초의 흑인시장이었던 탐 브래들리(작고)였다.
1976년 8대 회장에 김형일씨가 당선되며 첫 중임회장 기록을 세웠고, 김기성씨는 9-10대(1977-78년)를 연임했으며, 1979년 구한모씨가 11대 회장에 올랐다. 김기성씨는 한국 민주화 운동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한국정부와 미묘한 갈등을 빚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크고 작은 일이 끊이지 않으면서도 발전을 거듭했던 한인회는 구 회장을 끝으로 70년대를 마무리 지었다.
LA 한인회의 80년대는 이민휘씨(현 미주동포 후원재단 이사장)씨가 12대 회장에 오르며 막을 열었다.
이씨는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에서 7대(1971년)와 9대(1974년) 회장을 지낸 뒤 다시 LA한인회장을 두 번(12대·15대)이나 역임했다.
197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이주한 그가 1979년 LA한인회장에 출마하자 거센 반발이 일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 시절 현지를 방문했던 김대중 야당당수 연설에 강력 반발했던 사건은 사사건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또 일부 견제세력은 그를 ‘친 박정희파’로 분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동차 사업을 벌이던 김윤성씨와 당시 상의회장이던 장기열씨의 지원속에 후원행사를 열어 5만달러라는 선거자금을 확보하기도 했다.
당시 구한모 11대 회장이 연임을 모색중이었고, 이삼웅 11대 이사장과 신동욱 이사 등이 출마를 저울질 중이었지만, 결국 이씨의 단독출마로 승부는 싱겁게 끝났다.
이씨 당선 직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주변에서는 “이민휘는 이제 끝났다”는 얘기까지 나돌았지만, 위기는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1981년 4월 빙부상(독립선언문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인 이갑성)을 당해 서울에 들어갔던 그가 상을 마치고 출국하려다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구속된 것. 결국 그는 이 일로 임기 6개월을 남겨놓고 자진 사퇴한다.
이씨의 뒤를 이어 김명균(현 크리스천 헤럴드 대표)씨가 13대 회장으로 잔여임기를 물려받았지만 결국 이사진과의 갈등으로 그해 10월23일 사퇴했고, 11월30일 한인회 재건위원회가 조직됐다.
이듬해 3월 김시면씨가 14대 회장에 올랐지만 내부 갈등으로 한달도 채 못하고 끝났다.
한인회의 갈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5대 회장 선거에서 이민휘씨가 당선되자, 잔 문씨가 소송을 걸어 1년 가까이 지루한 법적공방에 휩싸였고, 결국 양측합의로 문씨가 이씨에 대한 음해성 루머에 대해 사과하는 대신 이씨가 사퇴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한인회의 혼란은 계속됐다. 잔 문씨가 회장으로 선출됐지만 경쟁자였던 장준철씨가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소송에 들어가 사실상 업무중단 상태에 놓이게 된다.(한인회 자료에서 문 회장이 몇 대회장인지 정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한인회를 그대로 나눌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1984년 LA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선수단 지원 등을 위해 한인회 재건 필요성이 강력히 제기되면서 잔 문 회장 당시 이사장이었던 김죽봉씨가 16대 회장에 오른다.
김씨와 경합을 벌일 후보로 치과의사 마부일씨와 노종국씨 등이 거론됐으나 이들이 출마를 포기함에 따라 김씨가 최종 승자가 됐다. 마씨는 훗날 금전문제로 샌버나디노 카운티 히스페리아 지역 주택가에서 안석찬씨(본인은 범행후 자살)로부터 총격을 받고 현장에서 숨지는 참변을 당해 한인회 관계자들을 충격속에 빠뜨렸다.
17대에서는 이기명씨가 약사였던 윤창기(현 미래은행 이사)씨와 경합을 벌여 회장에 올랐다.
이씨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최형우씨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국 정계진출을 모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75년 11월22일 한인사회와 한국정부의 지원으로 마련된 한인회관에서 개관식이 열리고 있다.
<다음주 월요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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