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탈레반들에게 납치된 한국인 인질이 두 번째로 살해되었다. 배형규 목사에 이어 심성민 씨가 다섯 발의 총탄을 맞고 처참하게 죽었다는 보도이다. 게다가 남아 있는 21명의 인질들도 언제 살해될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여 있다.
아아,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우주왕복선들이 화성과 목성을 오가는 이 개명한 시대에 이처럼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직도 남아 있다니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것도 종교라는 옷을 입고 신의 이름을 빌려 처형한다니 이건 또 무엇인가.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면 기독교도 과거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중세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생명들에게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어 잔인하게 처형한 것을 어찌 역사에서 지울 수 있겠는가.
특히 이슬람과는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엄청난 규모의 살인을 자행했었다. 그런 까닭에 지금도 피맺힌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 아닌가.
허지만 놀랍게도 기독교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라고 가르친 일이 전혀 없다. 오히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게다가 그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어린 양처럼 순순히 처형당했다. 기독교만은 결코 ‘죽이는 종교’가 되지 말고 오히려 ‘죽는 종교’가 되어야 할 것을 목숨 걸고 선언하신 것 아닌가.
그러므로 기독교가 한 때나마 ‘죽이는 종교’가 되었던 것은 창설자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반역행위일 뿐이다. 그리고 이 같은 반역행위는 종교와 권력이 결탁하여 체제유지와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것이 그 주요 원인이었다. 최근까지도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가 많은 피를 흘리며 싸웠던 북아일랜드의 사례가 이를 웅변으로 말한다.
이제 기독교는 이번 인질사태를 계기로 또한번 새롭게 결심해야 한다. 초대교회 때 순교자들인 스데반, 야고보, 베드로, 바울처럼 창설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는 종교’ 교리를 철통같이 지키자는 결단을 하자는 것이다.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이다. 11억명이 넘는다는 이슬람교도 가운데 ‘죽이는 종교’에 가담한 극렬주의자들은 그리 많은 수가 아니다. 게다가 이슬람교는 사실 기독교와 그 교훈의 60% 이상을 공유하고 있어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피맺힌 보복은 전혀 그 창설자의 뜻이 아니다. 이슬람권 역시 권력욕에 눈먼 사람들이 신의 이름으로 사람 생명을 파리 잡 듯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 ‘죽이는 종교’와 ‘죽는 종교’가 싸우면 결코 ‘죽이는 종교’가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길손의 옷을 벗기는 데는 따뜻한 사랑의 햇볕이 폭력적 바람을 이기는 법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선교는 사랑과 섬김의 선교여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쪼록 더 이상의 인질 살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살아남은 인질들도 지체 없이 석방시켜 주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새무얼 헌팅턴이 예견하는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의 대충돌 없이 오히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풀을 뜯는 평화의 시대가 오기를 기도한다.
이정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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