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 집에서는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지휘자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덕에 나는 줄곧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 덕분에 피아노 레슨 역시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음악을 시작한 것은 내 나이 세 살 무렵. 부모님 손에 이끌려 시작한 것이었지만, 지금 내 인생 최고의 인연은 단연 음악이라 할 수 있다.
좋아하는 일로 생계까지 꾸려나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기회는 아니다. 때문에 나는 ‘사랑의 언어’인 음악을 내게 소개해 준 부모님께 늘 감사한다.
하지만 내게도 피아노로 인한 아픈 기억 몇 가지쯤은 있다. 내 어린 시절이던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 피아노는 여자들의 전유물이었다. 남자가 피아노 치는 일은 흔치 않은 데다가 피아노를 배우는 것 역시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이상한 편견이 지배적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교수가 되기 전 꽤 규모가 큰 피아노 학원을 운영했다. 그런데 당시 100여 명의 학생들 중에 남학생은 단 둘 뿐이었다. 고등학생이었던 이 둘을 제외하고 나와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은 모두 여학생이었다. 어머니가 운영하는 곳이라지만, 여학생들 속에 끼여서 피아노를 배운다는 것은 나에게 무척이나 쑥스럽고 어색한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시간은 매일 아침 한 시간씩 진행되는 피아노 연습시간. 등교준비를 마치고 피아노를 치다보면 어김없이 친구들이 대문 밖에서 외쳐댔다.
“선규야, 학교 가자!”
그러나 친구들을 맞는 건 내가 아닌 어머니셨다. 어머니는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과일이나 빵을 내놓으셨고 친구들은 내가 연습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내 연주를 들으면서…
지금 그 친구들은 그 시간을 간식시간쯤으로 기억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친구들을 앞에 두고 피아노 연습을 해야 했던 나에게 그 시간은 창피하고 힘든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한번은 형의 친구가 집에 놀러왔다. 같이 놀러 나가자는 말에 연습을 하지 않고 나가려는 찰나 어머니는 어김없이 나에게 연습을 당부하셨다. 어린 마음에 도망을 치려고 그랜드 피아노 다리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가 날카로운 모서리에 눈을 부딪치고 말았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 입은 ‘영광의 상처’는 내 얼굴에 남아 있다.
때때로 아버지는 어린 나의 손을 들어주기도 하셨다. 내가 음악을 멀리하려고 할 때마다 “아이에게 힘든 음악을 꼭 시켜야 하겠느냐”고 어머니께 말씀하셨지만 어머니는 그때에도 물러서지 않으셨다. 내가 음악인으로 살아갈 것을 예견했던 어머니, 어머니의 선견지명과 노력 덕분에 나는 피아노 곁을 지킬 수 있었다.
입에 쓴 것이 약이 된다는 옛말이 있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는 몸에 좋은 것보다 당장 눈앞의 것을 보고 내달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그때마다 자녀들의 갈 길을 일러 주는 것, 그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내가 존경하는 세계적 피아니스트 백건우씨는 어느 소설가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베토벤만 쳐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자가용도, 핸드폰도, 컴퓨터도 없이도, 아내 윤정희씨와 살아가는 그는 음악과 함께라면 어디서든 행복할 거라는 말이다. 나 역시 그와 같은 말을 하고 싶다.
피아노 연습이 싫어 도망치던 열 살 꼬마는 이제 음악인으로 살고 있다. 피아노라는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을 주신 부모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지금 어린 자녀들을 교육하느라 수고하는 부모님들께 말하고 싶다. 자녀들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하라고. 그들의 인생을 보석처럼 빛낼 값진 인생의 선물을 말이다.

앤드류 박 베대스다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