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무렵이 오면 80세를 넘은 한인 노인들이 힘겨워하는 모습을 본다. 몰지각한 공산당의 테러에 온갖 힘든 일 들을 겪었던 그분들의 기억 속에서 무섭고 소름 끼치는 엄청난 일들이 지워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보자기에 쌀 한줌, 미숫가루 한 봉지, 옷 한 벌을 싸서 등에 메고 동네 큰길로 나갔다가 돌아온 것이 고작, 나의 어머니의 6.25사변의 기억이다. 라디오와 주변사람들의 떠도는 말에 마음속에선 공포를 느꼈지만, 경상북도 대구에 살았던 8살 소녀에겐 옆집 닭들이 국군들에 의해 모조리 없어진 것이 더 놀라운 일이었다. 전쟁 후 삶이 힘겹고 고통스러웠으며, 요즘처럼 풍성한 음식이 없었다는 것 이외에는 그다지 기억에 남을 충격적인 일은 없었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더우기 그 다음세대인 내게 6.25의 인상은 흐릿하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웅변대회나 평화통일에 관한 포스터를 만들기 등 거듭되던 반공훈련의 강도가 차츰 약해졌었다. 새 시대의 변화를 원하면서 전쟁의 아픔이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통일을 진전시키기 위한 과제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사진이 TV화면에 나오기 시작했고 그들을 부를 때도 ‘원수(웬수)’에서 ‘지도자’등 사회적인 존칭을 쓰기 시작했다. 한국전쟁과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못 느끼도록 하기 위해 전쟁에 대한 실감나는 자료나 다큐멘터리는 학생들에겐 접할 수 없게 하며 점점 사라져갔다.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결과적으로 궁핍한 경제와 변질된 사회 속을 헤매는 러시아, 중국 외 모든 공산 국가들의 모습을 불법체류로 넘어온 공산주의 시민들을 보며 자라왔기 때문일까, 불쌍하고 도와야하는 나라들로 인식되어 일부러 반공정신을 심어주지 않아도 되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다른 공산국가들은 점점 민주화를 선호하면서 변해 가는 세계에서 어처구니없이 고집만 센 아버지 같은 북한리더들이 핵으로 미국을 위협했을 때 그 고집이 밉지만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그들의 만용과 욕심 때문에 고통 받는 불쌍한 북한주민들의 실상을 전해 들으면서 남한과 북한의 오늘이 한국전쟁에서 낳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막바지 현실을 보여주는 것임을 깨달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과 미국을 걸쳐 살고 있고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나와 우리 세대가 어떻게 한국전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겠는가. 세계 으뜸의 명철한 한국인들이 왜 일본인들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자 마자 다시금 커다란 전쟁을 일으켰는지도 이해하기 힘들다.
리더들의 불타는 정치적 욕망, 그 결과가 낳은 아픔과 고통, 남과 북이 나뉘어 의사소통마저 달라진 현실, 같은 핏줄이 원수처럼 지내야하는 커다란 빚 같은 숙제를 남겨놓은 선조들이 솔직히 세상 사람들 앞에 부끄럽고 자랑스럽지 않다. 하지만 후손에게 좋은 세상 남겨주기 위해 어느 민족보다 우리선조들이 많이 힘썼다고 고집하고는 싶다. 6.25사변, 5.16혁명, 광주사태… 피 흘리는 고통을 견뎠어야 했으니까, 어느 정권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 좋은 것들을 받아들여 남북이 하나 되고 근사한 아시아의 등불이 되는 날이 곧 오리라 믿는다.
토마스 오 / 소셜워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