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밤이던가
볼록한 블라우스 같은 꽃을 안고 가던 길
달빛이 꽃의 손을 잡고
달의 뒤쪽까지 뚫린 구덩이를 다녀오자
상처를 핥아먹으려고 고양이가 따라왔다
어둠이 키워서 한쪽 얼굴이 삐딱한 고양이가 나를 본 순간
내게 무슨 무진장한 상처가 있는 것인지
찢어진 꽃밭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 그림자를 꾹꾹 밟으며 따라왔다
오래 전 뱃속에서 사라진 아이의 울음소리 같은
도무지 멎지 않는 피의 냄새 같은
이 검붉은 상처를 먹으려고
긴 혓바닥을 빼고 야금야금 다가왔다
나는 거미줄 아래 쪼그리고 앉아 고양이를 기다렸다
남의 상처로 생을 채우는 운명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하여
고양이의 눈 속을 들여다보다가 흠칫 놀랐다
희고 누런 얼룩무늬 털을 벗어놓고
내 몸, 내 팔다리, 내 입술을 다 빨아먹고 나를 걸치고 있다니,
창 너머의 고요를 탐하여 누군가 상처를 핥고 갔다면
달빛이 오는 밤엔
고양이로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운진(1971~) ‘고양이를 만나다’ 전문
한결같이 어둡고 음산한 이미지들로 조합된 탓인지 제법 그로테스크한 시다. ‘어둠이 키워서 한쪽 얼굴이 삐딱한 고양이’라든지 ‘오래 전 뱃속에서 사라진 아이의 울음소리’ 게다가 시인 자신을 걸치고 있는, 충격적인 고양이의 모습까지도 보여주고 있으니. 결국 자신의 상처를 끊임없이 추적해와 자신을 먹어치우는 고양이가 화자 자신이었다는 얘기를 하는 셈인데… 이 정도면 크게 나쁘지 않은 거 아닌가? 시인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해주고 싶다. 자. 축. 인. 묘… 내 속엔 십이지의 얼굴이 모두 들어 있노라고!
한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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