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년 아시안게임 여자육상 800m, 1500m, 3000m등 3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후 “라면을 먹고 뛰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일약 전 국민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육상선수 임춘애씨. 언론들은 ‘라면 먹고 달렸다’는 제목의 사설을 싣는 등 임선수를 헝그리정신의 상징으로 부각시켰으며 국민들은 이 스토리를 읽으며 감동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인 임선수가 어렸을 때 라면을 많이 먹으며 운동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국가대표가 된 그녀에게 태릉선수촌이 라면만 먹였을 리는 없는 일. 그런데도 국민들의 뇌리에는 마치 그녀가 라면만을 먹고 경기에 나선 것처럼 각인돼 버렸다. 가난한 집 출신 가녀린 소녀의 아시안 게임 3관왕은 분명 위업이지만 그녀의 스토리에는 영웅탄생을 바라는 사람들의 심리에 잘 부합되는 요소들이 덧칠돼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2차대전의 끝이 보이지 않던 1945년 일본의 이오지마 섬. 종군기자 로젠탈은 섬 상륙을 마친 미군들이 섬 최정상인 수리바치 산에 성조기를 꽂는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로젠탈의 사진 한 장은 전쟁의 끝이 보인다는 희망을 미국인들에게 전해준 상징물이었다. 사진속의 미군들은 즉시 미국인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올 초 개봉한 영화 ‘아버지의 깃발’은 이 사진의 진실을 파헤친 작업이다. 사진 속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전쟁영웅이 된 세 병사는 “우리는 단지 한 장의 사진에 찍힌 것일 뿐이며 진정한 영웅은 목숨을 잃은 전우들”이라며 이런 대접에 곤혹스러워한다.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이후 이들의 삶이 어떻게 피폐화 되어 갔는지를 보여준다.
이번주 워싱턴에서는 이색적인 청문회가 열렸다. 이른바 미국정부에 의한 전쟁영웅 만들기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청문회에 나온 증인은 미국 언론들을 들썩거리게 했던 영웅담의 주인공 제시카 린치 전 일병과 거액의 프로풋볼 계약을 거부하고 아프가니스탄 전선에 갔다가 사망한 펫 틸먼의 유가족들. 4년전 극적인 구출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던 린치는 “나는 람보처럼 싸우지 않았다. 나의 부상은 총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고 있던 험비가 뒤집혀 입은 것”이라며 미군 당국이 왜 자신을 ‘전설’로 만들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영웅만들기’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원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또 명분 없는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여론을 호의적으로 조성하기 위한 목적 등으로 끊임없이 이뤄진다. 또 대중들은 항상 영웅 출현에 목말라 한다. 그래서 매스컴이 만들어 내는 영웅들에 쉽게 열광한다.
문제는 만들어진 영웅들이 종종 가장 큰 피해자가 된다는 점이다.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시카 린치 일병도 지난 4년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진정한 영웅’은 존경받아야 하고 ‘만들어진 영웅’은 동정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논문 조작등을 통해 스스로 탄생한 ‘자작 영웅’은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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