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와 <주홀글씨>에 들어찬 심연, 혹은 사랑이 지나간 자리의 공허함
1. 모든 인간은 백일몽 환자다.
사랑은 백일몽인가? 일찌기 프로이드는(Gigmund Freud)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의 좌절과 관련지어 사랑을 설명한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 최초의 욕망은 어머니의 유방을 향한 일종의 “유아의 어머니를 향한 동일화의 욕망”으로서, 모태로부터 분리된 태아의 모태회귀 욕망에 가깝다. 유아가 보여주는 어머니의 유방을 향한 욕망은 아버지의 개입 즉, ‘아버지의 이름(name of father)’과 ‘아버지의 법’으로 인해 좌절되는데, 이런 심리적 발달기에 관여하는 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이며, 이러한 시기를 ‘오이디팔 스테이지(Oediphal stage)’라 명한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좌절당한 유아의 최초의 욕망은 죽지 않고, 인간 욕망의 목록의 가장 어두운 심연에 도사리고 앉아, 욕망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프로이드는 이와 같은 욕망의 불사불멸과 자기복제 행위를 향해, “욕망은 죽지않는다”는 공식을 대입한다.
욕망이 도대체,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간단 말인가?
이를테면,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는 오이디팔
스테이지에서 최초의 욕망인 어머니의 유방을 금지(지혜로우신 우리 어머니들은 빨간약, 일명 아까징키를 발라 아이들에게 호러무비를 재현하시곤 했다)당할 때 입은 정신적 외상(trauma)으로 인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최초의 욕망의 대상이었던 어머니의 유방의 대용으로서, 구강을 통한 쾌락인 흡연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드의 이론대로라면, 이 애연가는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구강을 통한 쾌락에 몰두하게 될터인데, 이것은 바로 ‘죽지않는 욕망’의 법칙에 지배받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어쨋든 중요한 것은, 욕망의 죽지않음, 즉 불사불멸성에 있다. 욕망이 구현하는 불사의 법칙을, 기호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Christeva)는 저 유명한 ‘N1-n2-n3-n4-…….-nN’ 차식의 수열식으로 표현한 바 있다.
나는 묻는다. 욕망이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욕망에 대한 모든 해명은 끝나도 되는 것인가? 나는 답한다, 천만의 말씀이라고.
우리가 애써 욕망의 불멸을 밝혀내는 더욱 중요한 이유는, 바로 욕망이 불사함으로 인하여 모든 욕망은 대체물이자 재현물이며, 시물라시옹 즉, 가짜라는 사실에 있다. 모든 욕망은 최초에 좌절당한 욕망인 어머니의 유방을 대체하는 가짜 욕망 즉, 유사욕망이자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므로 그 욕망을 꿈꾸고 쫓는 인간의 꿈 또한 ‘백일몽’이다. 그리하여, 사랑을 쫓는 인간은 백일몽 환자이며, 사랑 또한 그런 의미에서 백일몽이 되는 것이다.
2. <화양연화>, 지독한 사랑의 비정성시.
왕가위 감독의 필모그라피(filmography)를 살펴보면, 무척 재미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모든 영화들이 하나같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어긋남’이라는 철학적 문제와 맥락을 나란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의 어긋남, 시간의 어긋남, 장소의 어긋남, 그리하여 빚어지는 지독한 사랑의 어긋남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왜, 그의 영화 속 사랑은 언제나 어긋나기만 하는가.
<동사서독>의 구양봉과, 그가 목숨을 바쳐 사랑했으나 형과 결혼해 버린 여자와 황약사와 모룡연의 실타래처럼 뒤얽힌 사랑이 그러하고, <해피 투게더>의 보영과 요휘, 그리고 <중경삼림>의 수많은 남자들과 여자들의 사랑이 또한, 그러하다.
이들은 서로 마주치지만 결국 어긋난다. 불멸의 사랑을 찾아 인생을 싸구려 독주 마셔 없애듯 탕진해 버린 후 그들이 알아낸 진리란 다름 아닌, 인생이란 한바탕 백일몽처럼 덧없고 허무한 것이라는 사실. 그들은 모두 생의 허깨비를 쫓아 사랑이라는 이름의 백일몽을 꾸고 있었다.
왕가위 감독의 특허와 같은, ‘그 어느 곳도 아닌 곳에서의 그 어느 때도 아닌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화양연화>의 화면은, 중국 반환 시기의 홍콩 사람들의 정신처럼 시종일관 어둡다. 상하이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홍콩 빈민가의 낡은 아파트, 신문사 데스크인 차우(양조위)와 유부녀 리춘(장만옥)은 걷잡을 수 없는 불륜의 나락 속에 몸과 마음을 바친다. 그들은 각각 아내와 남편이 있는 기혼자들임에도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불륜의 늪을 헤어나올 수 없다. 금지당할수록 더욱 강렬해지는 서로에 대한 열망은 그들의 몸과 마음을 한없이 불타오르게 하며, 결국 소진시킬 뿐이다.
천신만고 끝에 하루를 함께 보낸 그들에게 남은 것은, 사막처럼 황폐해진 정신과 육체, 그리고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태워버릴 기세로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는 이상한 열망과 욕정이다.
그들은 한 나절의 사랑을 통하여 그들의 그리움과 한숨과 눈물을 보상받았는가? 이상하게도, <화양연화>의 사랑은 주체들을 연결하고 소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절시키고 분리한다.
<2040>을 보라. 공리는 만다린으로 ,양조위는 광동어로 , 그리고 기무라 타쿠야는 일본어로 사랑을 속삭이거나 말나툼 하거나, 자신의 과거사를 이야기 한다. 우습지 않은가. 이보다 더 지독한 단절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I’m in the mood for love,
Why stop to think of whether
This little dream might fade?
We’ve put our heart together.
보라, 그들은 말한다. 이 작은 꿈과 사랑의 밀어와, 사랑을 통해 합일된 마음조차 사라질 것이라고.
<화양연화>의 인물들은 사랑이란 일장의 춘몽이요, 백일몽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지독하게 몸을 사르고 마음을 태워 얻고자 하는 사랑과 욕망이란 단지, 한 때 좌절했던 욕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사실, 그리하여 특별하고도 완전한 마지막 사랑이길 바라는 그 사랑도 언젠가는 사랑이 지나간 한 자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어쩌면 이들은 미리 좌절하고 마는 것일지도 모른다.
3. <주홍글씨>, 죽거나 혹은 사랑하거나.
<주홍글씨>는 금지당한 사랑, 혹은 욕망을 향한 인간의 자기파멸의 교과서와 같은 영화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작가 김영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주홍글씨>는, 다름 아닌 토마스 하디의 <주홍글씨>에서의 A라는 붉은 글씨가 상징하는 간음의 죄 즉, Adultery의 기호이다.
기훈의 아내 수현의 대학동창이자 절친한 친구인 재즈 싱어 가희(이은주)와 고급 경찰 기훈(한석규)은 오랜 세월 밀애를 즐겨온 사이다. 가희와 수현을 오가며 위태로운 사랑의 줄타기를 해야하는 기훈은 가정과 사랑과 일, 이 모두를 조화롭게 운영해 가는 일에 갈수록 힘겨워하지만, 어쩌랴, 욕망을 쫓도록 훈련된 기훈의 몸과 마음은 사랑과 생활, 그 어느쪽도 포기하는 것을 허락치 않는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결국 가희와 기훈의 관계를 알게 된 수현으로부터 기훈은 이혼을 요구받게 되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가희의 임신소식까지 접하게 된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기훈과 가희는 근교로 짧은 자동차 여행을 하게 되고, 어쩌다 죽음처럼 어둡고 좁은 자동차 트렁크 속에 갇혀, 언뜻언뜻 스치는 죽음의 검은 옷자락과 조우하는 두 사람.
그리고, 죽음이 눈 앞에 다가왔을 때, 기훈은 가희로부터 뜻밖의 진실을 듣게 된다. 가희와 수현은 ?대학시절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며, 수현은 기훈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기훈을 가희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기훈과 결혼했다는 사실, 그리고 수현은 아직도 가희만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밀폐된 공간 속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유산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가희의 애원으로 가희를 사살하고 홀로 살아남은 기훈은 말한다. “가질 수 없는 사랑일수록 더욱 매혹적이다” 라고.
<주홍들씨> 속, 기훈과 가희가 갇혔던 자동차의트렁크는 분명 자궁의 메타포어이며, 가희란 ‘가질 수 없’으며 ‘금지된 것’에 대한 알레고리임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이쯤되면, 기훈은 가희라는 주체가 아닌,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을 쫓는 중증의 백일몽 환자가 된다.
기훈이 꾸는 백일몽은 가파른 삶의 골짜기를 넘고 수많은 굽은 길을 지나 욕망의 붉은 열매들이 탐스럽게 매달린 푸르른 나무들이, 영원한 생명으로 빛나는 저편, 금지된 정신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낡고 해묵은 욕망의 원천이자 수많은 원죄의식의 기원이다. 모든 욕망이 그러한 것처럼, 기훈과 가희와 수현이 걷는 욕망의 길은, 그들의 욕망이 한낯 백일몽임으로 인해 언제가지고 지연되리라.
4. 호모 비아트로, 신과 함께 가다.
꿈꾸는 자는 어느 특정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거의 자발적으로 그는 방금 있었던 곳을 떠나 움직인다. …………꿈은 도피하는 전초병이요, 서서히 명료하게 되는 우리의 갈망을 위한 첫번째의 숙소나 다름 없다. 그 꿈을 통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무엇에 대하여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하게 된다.
에른스트 블로흐
에른스트 블로흐(Ernest Bloch)는 백일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블로흐에 의하면, 백일몽이란 아직 의식되지 않은 꿈에 가깝다. 그것은, 창조적 의지라는 점에서 희망의 원리라 명명되기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타오르는 에너지의 분출이라는 점에서 폭력과 파괴의 원리라 명명되기도 한다.
<화양연화>에 비해, <주홍글씨>는 비정하게도 영화 속의 인물들을 비정상성, 그러니까, 과도한 광기의 세계로 몰아간다. <화양연화>의 차우와 리춘과는 달리, <주홍글씨>의 가희와 기훈과 수현은 욕망을 세련되게 처리하지 못한다. 그들은 욕망의 심연에 들어앉은 저 텅빔과 허무를 알지 못한다. 욕망 앞에 더욱 솔직하게 반응하는 이들 가희와 기훈과 수현은 어쩌면 더욱 깊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 한 인종이 있다. 그것의 이름은 바로 호모 비아트로(homo viatro). 오이디푸스 대왕은 신탁을 피하기 위해 버려졌으나, 오히려 그 버려짐으로 인하여 신탁은 완성된다.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를 아내로 맞을 것이라는 신탁을 피하기 위해 버려진 오이디푸스는 신의 도움으로 결국 자신의 아비를 살해하고 어미를 아내로 맞게 되지않는가.
게다가 애초에 신탁이 있었다는 사실도, 아버지를 살해하여 왕국과 왕비(자신의 아내여 어머니)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도 몰랐던 오이디푸스 대왕의 비극은 인간 욕망의 뿌리 깊은 역사가 짊어진 비극성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욕망을 쫓아 ,평생을 백일몽만을 꾸도록 신탁받은 것이 인간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인간을 일러, 호모 비아트로하고 명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호모 비아트로, 신과 함께 가라.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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