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미간의 최대 현안은 한미 자유 무역 협정(FTA)이다. 한미 양국 의회의 비준을 받아 발효된다면 세계 1위인 미국과 10위인 한국 시장이 하나로 묶이는 새 역사가 이뤄진다. 자유 무역을 비롯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주축으로 하는 21세기 세계를 가능케 한 영국의 공과 과를 조명해 본다.
‘Amazing Grace’는 한인들에게도 친숙한 찬송가다. 이 곡을 쓴 존 뉴턴은 영국 성공회의 목사였지만 한 때는 노예 무역상이었다. “나는 한 때 장님이었지만 이제는 본다”는 노래 가사 내용으로 보면 노예장사를 하다 회개한 후 목사가 된 것 같지만 사실은 독실한 기독교도가 된 후에도 오랫동안 노예 매매업에 종사했다. 그가 노예제의 비인간성을 깨달은 것은 그 훨씬 후다.
<영국은 한때 대서양 노예 매매의 1/3 을 담당했으나 결국은 그 폐지에 앞장섰다>
아프리카 노예를 잡아다 서인도 제도와 아메리카 대륙에 판 대서양 노예무역을 시작한 것은 포르투갈이다. 그러나 영국은 그 규모를 대대적으로 확대, 1662년에서 1807년 사이 350만 명에 달하는 흑인 노예들이 영국 배에 실려 대서양을 건넜다. 대서양을 건넌 모든 흑인 노예의 1/3이 넘는 숫자다.
노예무역 후발주자인 영국은 처음에는 그 비인도성을 지적하며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노예장사로 벌어들이는 돈의 액수가 너무나 크고 식민지 사탕수수 밭에서 일할 인력이 절대 부족하자 결국 1등 노예 매매국이 된 것이다.
19세기 초엽까지 서유럽 각국 중 노예무역에 종사하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었다. 이들이 노예를 사고팔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한 때 그처럼 번성했던 노예 매매가 어떻게 사라지게 됐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흑인 노예 매매제 폐지에 공이 큰 사람 하나를 들라면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를 빼놓을 수 없다. 뛰어난 웅변가이자 정치인이었던 그는 자기가 살던 동네의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클래펌 일파’를 조직, 노예 매매 금지 캠페인을 벌였다. 17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 캠페인은 리버풀 노예상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 영국민들의 양심을 움직여 1807년 의회로 하여금 노예 매매 금지법을 통과시키게 만들었다.
이 캠페인 주도자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1814년에는 노예제 자체를 폐지하자는 청원서에 75만 명의 서명을 받아 제출했다. 1833년 영국 의회는 노예제를 금지하고 대영제국 내에서 모든 노예를 해방시켰다. 한 때 노예 수송선을 호위하던 영국 함대는 노예 매매선을 적발해 이를 풀어주는 일을 맡게 됐다.
당시 세계의 제해권을 쥐고 있던 영국이 아프리카 해안을 순시하며 이를 금하자 대서양 노예 매매는 역사의 쓰레기 통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당시 노예제가 경제적 효용이 떨어져 폐지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미국에서는 그 후 30년이 지난 1865년 4년간의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서야 이를 없앨 수 있었다.
대서양 노예무역 금지 못지 않게 영국이 현대 세계 발전에 기여한 것이 있다. 자유 무역의 확산이다. 19세기 이전 세계 각국은 중상주의를 기본 정책으로 하고 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교역을 통제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 무역이 어째서 모두에게 이로운가 하는 이론적 발판을 세우는 것과 함께 힘으로 이를 실현시킨 것이 영국이다.
영국은 현재의 미국과 캐나다, 인도, 호주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함으로써 세계 무역이 이뤄질 수 있는 현실적인 발판을 마련했다. 이는 과거 모든 다른 제국과 마찬가지로 원주민들의 학살과 수탈 등 비싼 희생 위에 이뤄졌지만 지국 곳곳까지 자유로운 물자와 자본의 이동을 가능케 함으로써 세계 경제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초를 놓았다.
영국인이 세우고 그 후손이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고 있는 미국과 캐나다, 호주는 말할 것도 없고 인도에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전통을 퍼뜨려 물려받게 한 것 또한 영국의 유산이다. 1858년부터 1947년까지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기 위해 채용한 영국 관리 수는 연 1,000명을 넘은 적이 거의 없다. 그 적은 인원이 4억이 넘는 인도인을 통제할 수 있었다는 것은 상당수 인도인들이 영국의 통치를 묵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엽까지 세계사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민주주의, 자본주의, 세계화, 자유 무역과 영국의 역사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역사적인 한미 FTA 타결을 맞아 영국의 공과 과를 생각해 본다.
대영제국 성공의 원인
21세기 현대 세계가 지금 상태로 존재하는데 영국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나를 광범위하게 효과적으로 기술한 책 중 대표적인 것이 닐 퍼거슨이 쓴 ‘제국’(Empire)이다. 351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에서 영국 출신으로 현 뉴욕대 교수로 재임하고 있는 저자는 어째서 유럽 변두리에 위치한 영국이 한 때 전 세계를 제패했는가와 노예 매매, 식민지 수탈, 아편 전쟁 등 세계에 끼친 해악과 민주주의 자본주의 자유 무역의 확대 등 공로를 상세하고 흥미롭게 적고 있다.
한 때 신대륙 원주민들의 금은보화를 약탈해 오던 스페인 선단을 약탈하던 해적으로 대서양에 모습을 드러낸 영국인들은 그렇게 얻은 재화를 스페인처럼 종교 전쟁에 탕진하지 않고 보다 나은 전함을 개발하거나 사탕수수 농장을 세우는데 투자했다. 스페인의 몰락과 함께 신흥강국 네덜란드와 경쟁을 벌이던 영국은 1688년 명예혁명이 성공, 네덜란드의 윌리엄 공이 영국 왕으로 오면서 더 이상의 불필요한 국력 소진을 피하고 유럽 열강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다.
그러나 영국 팽창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잉글랜드는 본토는 물론,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 등 각 지역 주민들의 해외 진출 열기였다. 지금처럼 비행기 한 번 타면 바다를 건너던 시절도 아니고 수개월 동안 풍랑과 싸우며 낯선 땅에 도착해 원주민과 풍토병, 기아와 싸워야 하는 험난한 길을 수많은 영국민들이 자진해 떠났다.
이들 대부분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이주했지만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영제국이 정점에 있던 19세기 중반 주로 독실한 기독교도인 박애주의자들이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원주민들을 돕기 위해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오지로 건너갔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데이빗 리빙스턴이다. 지금은 잊혀져가고 있지만 국경을 넘어 인류애를 실현한 이들의 행적도 기억돼야 할 부분이다.
퍼거슨의 ‘제국’은 대영제국의 직계 후예인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미국을 알기 위해서나 세계를 알기 위해서나 한번쯤 읽어둬야 할 책이다. 한국어 번역판도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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