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작가 시리즈-고양이 살해로부터 뱀장어 스튜 끓이기까지-2
1. 에로티시즘-죽음을 흉내내다.
일찌기 프랑스의 철학자 죠르쥬 바타이유(Georges Bataille:1897~1962)는 에로티시즘을 일러, ‘불연속적인 인간의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의 한 형태’라고 표현한 바 있다.
탯줄로 연결되어 있던 모태로부터 분리되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의 삶이란 불연속성을 경험해 가는 도저한 과정의 연속이다. 모태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불연속적 경험을 통해 불가해한 세계 속에 발을 디딘 인간은, 그물처럼 촘촘히 얽혀있는 관계성을 통해 개체와 개체 간의 불연속성을 경험하며 살아가다가, 종내에는 죽음이라는 불연속성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인간의 운명은 탄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하나의 불연속성을 향한 지난한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죄과로 낙원에서 추방 당한 이래, 죽음이라는 아득한 심연을 향한 여정을 거부할 수 없음에도, 출산이라는 행위를 통해 개체의 재생을 꿈꾸고 무병과 장수를 기원하는 인간의 운명이란 일종의 아이러니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불연속적인 인간의 연속성에의 열망과 제의적 기원의 한 가운데에서 에로티시즘이 탄생한다. 에로티시즘은 불연속적인 운명을 질머진 인간의 연속성에의 열망이며, 불연속성을 재현함으로써 열리는 연속적 세계에 대한 엿보기이다.
그것은, 예언된 미래의 죽음에 대한 의사체험을 통한 재탄생으로서, 제의적 죽음의 한 형태이자, 죽음을 흉내내는 방식 즉, 불연속성을 통해 삶의 연속성을 성취하는 일이다. 프레이저(J.G. Frazer)는 그의 저서 황금가지(Golden Bough)에서 인간의 연속성을 향한 의사죽음의 체험을 농경사회의 갖가지 제사 속에서 찾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허수아비를 태워 그 재를 대지 위에 뿌리는 일이나, 짐승의 피를 대지에 뿌리는 일 따위 즉, 죽음을 상징하는 재와 피의 의식을 통해 겨우내 죽은 대지의 소생을 예견하는 일과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의사 죽음 즉, 제의적 불연속성을 체험하는 것일까? 바로 에로티시즘이다.
모든 에로티시즘은 폐쇄적이고 불연속적인 상대방의 구조를 파괴함을 원칙으로 하며, 폭력적인 동시에 격렬한 무질서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죽음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에로티시즘에 빠진 두 남녀 중에 여성은 희생자, 남성은 제물 헌납자로 보인다”는 바타이유의 언급은 에로티시즘의 폭력성을 잘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자, 생각해 보라. 인간은 이 상징적 제의로서의 의사죽음인 에로티시즘이라는 불연속성을 통해 삶의 연속성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이 에로티시즘이라는 화두가 사드(Sade)의 <쥐스띤느> 이래,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현대 부르주아 문학의 가장 주요한 문제의식으로 두각을 나타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권지예의 <뱀장어 스튜>는 특별하다. 약간 투박하지만 간단히 말해보자면, 권지예의 <뱀장어 스튜> 는 삶이라는 심연 속에 도사린 검은 구멍 즉, 죽음이 거느리는 불연속성에 대한 에로티시즘적 풀어쓰기라 할 수 있다.
2. <뱀장어 스튜> 속에서 끓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권지예의 <뱀장어 스튜>의 무대는 프랑스이다. 그래서인가? 작품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멜랑콜리하고 프레샤야스하다. 사랑 속에 숨은 폭력과 열정과 파괴적 역동성에 대한 은유로서의 뱀장어는 권지예의 소설 속에서 요리코드와 겹쳐지면서 더욱 에로틱하게 변모한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불륜, 그것도 국경을 넘나드는 애정행각을 그린 소설이라는 점에서, 언뜻 <뱀장어 스튜>는 트랜드 소설이 보여주는 경박성과 통속성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미혼모 모티브가 그러하고, 사랑과 섹스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이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범속한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뱀장어 스튜>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모든 범속한 재료들을 단번에 꿰뚫고 도달한 심연 즉, 사랑과 섹스와 불륜과 뱀장어와 같은 시니피앙들(significant)이 혼효되어 생산해낸 시니피에(signifie)의 특이함이다.
한 때 미혼모로 아이를 입양보낸 경험이 있는 여자는, “15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8년, 5년, 3년 전에”도, 오로지 섹스를 위해 옛애인(외국으로 입양 보낸 아이의 친아버지)을 만나러 한국으로 간다. 그것은 반복적이고 편집적인 형태로 이루어 진다. 옛애인은 여자로 하여금 사랑의 폭력적 본성과 허무함을 깨닫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자살로까지 이끈 남자이지만, 여자는 남자와의 관계를 끊지 못한다. 사랑도 중독이 되듯, 그것은 중독된 관계에 가깝다.
“오고 싶을 땐 언제든지 와. 난 항상 열려 있으니까. 아니, 난 문이 없어”라고 말하는 옛애인에 비해, 현재의 남편은 “모욕감을 느끼게 하지 않고도 그 상처들을 따뜻하게 핥아주는 남자”, 곧 파리의 가난한 한국인 화가이다. “상처를 지닌 스무 살 부터 많은 남자”를 섭렵한 여자는 인생의 텅빔과 몸부림칠수록 더욱 옥죄어오는 막막한 인생의 심연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여자는 그 심연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섹스에 더욱 탐닉하게 된다.
54일간의 마지막 방황과 외도 뒤에 프랑스로 돌아온 여자를 위해, 남편은 기꺼이 ‘삼계탕’을 끓인다. 지옥처럼 뜨겁게 끓어오르는 물 속에서 닭의 살이 서서히 육탈해 가는 동안 , ‘돌아온 탕아’인 여자와 착한 남편은, 냄비 속에서 끓는 닭과 물처럼 섹스를 통해 서로에게 침투하고 화해에 도달하게 된다.
사실, 소설의 줄거리 만으로는 <뱀장어 스튜>에서 별다른 특별함을 찾아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뱀장어 스튜> 전체를 지배하는 에로티시즘의 독특함 즉, 인간이라는 존재가 타고난 불연속성에 대한 맞섬의 방식, 혹은 자기 파괴적 대항으로서의 폭력성의 이미지가 드러나는 방식은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남편의 얼굴이 잔인하게 빛났다. 바퀴발레를 죽인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진다. 남편도 그녀에게 살의를 느끼는 게 분명했다. <뱀장어 스튜>
<뱀장어 스튜> 속의 여자와 남자들은 존재의 파괴를 위한 폭력으로써 섹스에 몰두한다. 그들에게 섹스란 일종의 제의적 행위인 동시에 제사를 중심으로 배치된 제물 헌납자와 희생양 사이에 내재한 순수한 폭력성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순수한 에로티시즘의 영역에 가닿게 된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뱀장어 스튜> 의 에로티시즘이 섹스와 폭력성과 음식이라는 코드가 맞물림으로써, 더욱 강렬한 미적 수위에 도달해 있다는 점이다.
<뱀장어 스튜>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화가 피카소가 만년에 그린 그림 제목인
을 지칭하는 것.
아흔 살이 넘도록 장수하면서, 수많은 명화만이 아니라, 지독한 여성편력으로도 세상을 놀라게 했던 난봉꾼 화가 피카소가, 그의 나이 79세 때 자신의 마지막 여자인 자끌린을 위해 그린 그림이 바로 <뱀장어 스튜>이다.
<뱀장어 스튜>는, 검은 뱀장어들이 난교하듯 서로 얽혀 있는 그림에서 보여주는 바처럼, 생명력이자 죽음이고, 불연속성이자 연속성이며, 섹스이자 폭력인 동시에 쾌락이자 살해의 시학이다.
격정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그건 그저 아름다운 하나의습관, 견딤, 의리라 한들 어떨까. 생이라는 건 질긴 것이다. 구슬을 꿰는 실처럼, 하루하루 끊임없는 애증으로 엮어진 질긴 실인 것이다.<뱀장어 스튜>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묻는다. 불연속적인 존재인 인간이 보여주는 연속성을 향한 꺼지지 않는 욕망의 알레고리인 뱀장어를 푹 고으고 익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권지예는 말한다. 그것은 어쩌면 일상화된 삶 속에서 의사죽음을, 에로티시즘을 습관화해가는 일과 등가의 것이라고. 그것은, 피카소의 자끌린처럼 뱀장어를 고으는 일이거나, 여자의 남편처럼 삼계탕을 끓이는 일이거나, 섹스를 통해 죽음에 필적하는 에로티시즘에 도달하는 일이다.
3. 환멸을 이겨내는 방법.
이쯤되면, <뱀장어 스튜>가 인생과 사랑과 섹스에 대한 환멸의 기록임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뱀장어 스튜> 전체를 지배하는 ‘죽음 의식’이란 것이 단지 죽음에 대한 미혹과 두려움이라면, 이 소설은 얼마나 통속적이고 무미건조해져 버리고 말았겠는가.
이 지점에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Angst Essen Seele Auf>를 <뱀장어 스튜> 위에 오버랩 해 본다.
낯섦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이자, 낯선 사람, 낯선 삶, 낯선 죽음, 낯선 세상에 대한 시학으로서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소설 <뱀장어 스튜>와 많이 닮아 있다.
죽음에 서서히 잠식당하여, 불연속성의 세계로 끊임없이 끌려 들어가는 인간의 불안,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은 모든 인간을 무참히 잠식하고 먹어 없애 버린다. 그리하여 <뱀장어 스튜>의 여자와 남자들은 칼같은 살의(殺意)를 품고 살인과도 같은 섹스로 침몰하여 에로티시즘의 궁극에 가닿는 방식을 통해 이 ‘불안’을 이겨낸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를 보라. 말미의 반전으로 인해 <뱀장어 스튜>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훨씬 웃돈다. <뱀장어 스튜>가 보여주는, 불가해한 삶의 낯선 이질감을 견뎌내는 방식은 은근하게 우려낸 곰국처럼 얼마나 감칠 맛이 나는가. 그렇다. 삶의 불안이 우리를 잠식할 때, 몸부림치고 격정을 토해내는 쪽보다, “신이 조절한 타이머에서 종소리가 날 때까지” 그것을 견디고 조용히 우려내며 살아갈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갑자기 삶이 낯선 얼굴로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우리에게 덤벼들 때면, <뱀장어 스튜>를 끓이는 자끌린이 되어, 혹은 양은 냄비 속에 닭을 고으는 남편이 되어 소설의 한 대목을 조용히 되뇌어 볼 일이다.
인생이란 화려하지도 않고, 더군다나 장엄하지도 않으며 다만 뱀장어의 몸부림과 같은 격정을 조용히 끓여 내는 것이 아닐까……. 스튜냄비의 밑바닥처럼 뜨거움을 견디고 살아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용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신이 조절한 타이머에서 종소리가 날 때까지 말이다. 하긴 꼭 뱀장어 스튜가 아니면 어떤가. 삼계탕이나 곰탕, 뭐 이런 것들도 조용히 끓고 있는 것이다. <뱀장어 스튜>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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