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대부분 명산은 불교적 이름표를 달고 있다. 금강산, 묘향산, 속리산, 오대산, 지리산, 한라산은 물론 광주의 무등산, 대구의 팔공산, 강화의 마니산 등등 헤아릴 수가 없다. 백두, 태백, 소백산 등은 민족 신화와 관계있는 산이름이지만 유독 소요산은 노자와 장자의 이름을 전해주는 산이름이다.
소요산은 동두천이란 소읍에 위치한 산인데 서울의 북쪽 변두리인 의정부에서 좀 더 북쪽으로 가야 한다. 지금은 육이오사변 이래 미군의 주력 부대가 주둔하고있는 군사 지역으로 더 유명한 곳이며 조금만 더 가면 한탄강이 나오고 남북의 국경지대가 나온다. 저 멀리 삼국시대에도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지대였음은 역사적 아이러니라고 아니할 수 없다. 산이 나무를 싣지 않고 돌이나 이고 앉았으면 건방지고 위압적이다. 이러한 돌산들은 처음 보면 경이롭지만 자주 보면 싫증이 난다.
서울을 품고있는 산들이 대부분 골산(骨山)들이라 짜증이 나다가도 남쪽의 청계산, 남한산이나 북쪽의 소요산 같은 육산(肉山)을 보면 살고 싶은 정을 느끼게 한다. 소요산은 장자의 소요 정신을 기리는 위대한 꿈을 꾸는 산이다. 이 세상을, 오탁악세(五濁惡世)를, 거닐듯 노닐듯 살아가는 유유함이 없다면 엄청 힘들 것을 걱정한 장자 어른의 가르침이다.
허심탄회하라! 마음을 비워낸 다음에 너그러움을 회포해야만 살아가기가 좀 여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품어야 할 그 ‘너그러움’이란 무엇일까. 장자에 의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상대성, 관계성, 사회성으로부터 초월한 개인 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개인 정신의 홀로 섬(독립)을 절대시한다. 개인의 제도화나 규격화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장자의 정신세계다. 그러므로 조직화된 것은 무엇이나 경멸할 자신이 없는 사람은 결코 장자를 이해할 수가 없는, 그는 그렇게 독보적인 사람이다.
물론 너그러워진 개인은 ‘절대’를 쥐었다 폈다 하며 ‘절대’를 창조하기도 하고 폐기하기도 하는 그러한 것이다. 뒷날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고 또 5세기나 뒤에 중국 고유의 선불교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장자의 사상에 의거한 것은 명백한 일이다. 신라 때의 원효도 이미 이것을 자재(自在)함과 무애로 파악했음이 사실이다. 원효가 요석궁에서의 난처한 입장에 빠져나와 쉬지 않고 달려온 곳도 바로 이 소요산이며, 가파른 골짜기에 암자를 얽어매고는 자재암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자재로워야 소요산의 이름값을 할 것이 아닌가. 원효가 대선배인 장자를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도인에게도 참 딱한 일이다. 소요산에 자재암을 짓고 칩거한 지 삼 년 뒤에 요석공주가 아들 총(聰, 설총<薛聰>을 뜻함)이를 앞세우고 소요산을 찾아온 것이다. 자식에게 아비를 생면시켜야 할 명분을 안고 말이다. 석 달이나 산채를 만들어놓고 기다리는 요석공주에게 원효는 마침내 글을 적어 시종에게 보냈다. ‘나는 소요산의 신선이 되어 세속으로 향하는 발이 없어져 내려가지 못하노라’
원효가 죽은 뒤에 아들 설총은 경주 분황사에 아버지의 소상을 만들어 모시고는 매일 예불을 드렸다고 하니 이것은 그 어머니 되는 요석공주의 심정을 전한 것이라 하겠다. 좌절과 절망을 안고 살아야했던 그 여인의 심정 말이다.
그러나 더욱 이상한 것은 요석 공주가 소요산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원효는 소요산을 내려와 발이 없어 못간다는 세속으로 숨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신라에서 원효는 사라지고 복성거사가 되어 비승비속(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으로 유리걸식하는 광대가 된 것이다. 바라 치고 춤을 추며 뒤웅박을 두드리고는 무애가를 불렀다.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회(법회)도 열지 않고 막무가내로 나무아미타불만 외치고 마을에서 마을로 떠돌아 다녔다.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는 극락정토에 대해 설명회를 열 만큼 원효는 미련한 사람이 아니다. 정토를 외친 것은 예토(穢土, 더러움이 있는 땅) 있음을 알리기 위한 방편이고 또한 예토의 좌절과 절망에 동참하고자 함이 아니었겠는가.
원효는 전 생애를 통해 제도(시스템)의 구원 없음을 몸소 보여주려고 애쓴 사람이다. 승단에 끼이는 것을 꺼려하고 절을 짓지도 않았다. 원효암은 많아도 원효사는 없다. 당대의 쌍벽이던 의상대사가 해인, 통도, 범어 등의 화엄대찰을 무수히 짓고 경전을 수집하고 간행에 힘을 썼던 것과는 유(類)를 달리하는 입장이었다. 이 봄에 소요산에 올라 장자의 꿈이나 한 번 꾸어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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