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돌아온 후에도 그 책들만 보면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다. 사랑하니까, 사랑으로 읽어달라던 그 얼굴의 표정이 아른거리고 귀에서는 그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할 수 없이, 어쨌거나 책이니까 읽어보자로 결심을 했다. 얼마나 억지로, 억지로 읽었으면 6개월이나 걸렸을까. 얻은게 있다면 ‘성경을 한번도 안 읽은 작가’라는데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 뿐이었다. 해마다 여름 휴가에는 성경을 통독하는데, 그해 여름이 37번째가 된다는 어느 미국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어처구니가 없어 했던 나였다. 거기다가 성경은 꿀 맛이라고 찬양을 했다. 나의 첫번째 성경 통독은 오직 쓴 맛이었다. <전도서>를 위시하여 <잠언>이나 <시편>은 문학작품 비슷한 맛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쓰기만 했다. 하지만 나는, 성경만은 다시 읽어 보기로 했다. 어찌해서 꿀 맛인지,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괴테나, 도스트엡스키등 수많은 작가들이 하나님께 의존하게 된 이유를 찾고 싶었다.
두번째 성경 통독은 한권 만으로도 6개월이 걸렸다. ‘역사책이라고 생각하고 읽어 보아라’, ‘소설이라고 생각하며 읽어라’, 6개월간 쓴 맛에 견딜 수 없었다고 말하자 주위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역사책으로 한번, 소설로 한번, 모두 네번을 읽었다. 맛이 조금은 완화 되었으나 여전히 쓰다는 느낌으로 나는 하나님도 의식하지 말고 <야담과 실화>로 한번 더 읽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섯번째의 성경 통독으로 들어간 사이사이에 신앙에 도움이 되는 책을 수백권을 읽었다. 서점을 운영하던 전장로는 한국 유명 목사들의 저서와 테잎을 끊임없이 내게 선물했다. 지금은 텍사스에서 목회를 훌륭히 하고 있지만 전도사였던 최목사는 장시간의 내 질문에 곤혹을 치루기도 했다. 이 지역에 오는 유명 목사들도 하나같이 내게 붙들려 시달려야 했다. 사울이 따로 없었다. 내가 곧 현대판 사울이었다.
성경을 다섯번이나 이어서 이어서 읽어도 꿀 맛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피흘리며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했다’는 것, 그리고 성령으로의 잉태며, 부활은 더더구나 가슴에도, 머리에도 닿지가 않았다. 받아들이고 싶은데, 이해가 되지 않는 고통의 기간이 계속되었다.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시절이 그리웠다. 윤목사가 원망스럽고, 들쳐 메고 온 가방 속 13권의 책이 원망스러웠다.
다시 한국에서 나를 초청했다. 이번에는 한국과 해외에 있는 한국 예술인들이 모이는 행사였다. 나는 한국에 하루전에 도착해서 명동의 유니 의상실로, 그야말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나의 고통을 늘어 놓았다.
‘괴로워하지 마세요. 이미 주님의 사랑안에 있고 주님을 사랑하고 있으신 것을 나는 알아요. 때가 되면 언니도 알거예요.’
그리고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틈틈히 주일 예배와 부흥회에 나를 데리고 갔다. 성경을 읽을때 보다도 더 쓴 맛에 혀가 갈라질 지경이었다.
한국에서는 행사가 많았고 잊지 않은 문단 선배들은 나를 챙기며 초청했다. 이렇게 한국을 왕래하며 성경과의 전투가 휴전도 없이 10여년이나 갔다.
‘이 책을 한번 읽어 보세요. 정선생님이 좋아할 분이 쓴 거니까요.’
전장로가 서점으로 나를 불러서 준 책은 이재철 목사의 신앙고백서였다. 사진과 저자의 말등 대략 훑어보니 매력이 있었다. 나는 그 책을 받아들고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해외 한국 문인들만 초청하는 행사가 있었기에 몇일 후에 한국에 갔다. 시인 구상 선생의 소개로 이목사를 처음 만나던 날은 서로 자신의 저서만을 교환하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다시 만나기로 한 날은 하늘이 몽땅 뚫렸는지 비가 펑펑 쏟아졌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에도 옷이 빗물에 젖어 물이 뚝뚝 떨어졌다. 빗물이 창을 요란하게 때리는 데도 목사는 고요하게, 고고하게 목사실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잠시 긴장되었지만 휴전도 없이 계속되는 하나님과 성경, 그 싸움에서 이번에야말로 결론을 내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사울이 되어 언어의 폭력을 휘둘렀다. 1초의 흔들림없이 고요히도, 고고히도 침묵 일관으로 장시간이 지난 후 이목사로부터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지난번에 주신 단편 소설 <광화문 이야기>를 장편으로 써 주시겠습니까?’
이때까지 내가 던진 질문과 소설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나는 눈으로 물었다.
‘긴 세월을 <도스트엡스키>같은 한국인 기독교 소설가를 기다려 왔습니다.’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기독교 소설가라니, 도스트엡스키라니, 이목사의 출판사는 오직 <믿음의 글>만을 발간했다.
‘기독교 소설은 쓰고 싶지도 않고 쓸 능력도 없습니다. 혹시, 훗날, 70이 넘어 한가해지면, 쓸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얼마 후에 내가 말했다.
‘<광화문 이야기>를 그대로, 장편으로 확대하면 됩니다. 단, 끝 장면만 주인공들이 주님안에서 승화되는 것으로 쓰면 됩니다.’
‘그건 간단해요.’
내가 즉각 대답했다.
‘집필로 들어가기 전에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목사는 엔도 슈사꾸의 <침묵>을 위시하여 버넌, 루이스 등의 책 이름과 성경을 적어 쪽지를 내밀었다.
‘이걸 먼저 읽고 시작하셨으면 합니다.’
내가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었다. 그 중에 오직 성경만, 그것도 다섯번이나 읽지 않았던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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