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양이 뿔을 걸듯
<전등록:傳燈錄>에 전하는 설봉존자(雪峯尊者)의 말씀 중에,“영양이 뿔을 건다”는 말이 있다. 알다시피, 영양이란 뿔이 둥글게 꼬부라진 염소과의 동물인데, 영양이 뿔을 걸다니, 도대체, 어디에, 왜, 건다는 말일까?
말인 즉,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영양이 꼬부라진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는 허공 중에 데롱데롱 메달려 잠을 잔다는 뜻. 결국, 땅 위에 난 발자취를 쫓아 영양을 쫓던 맹수의 입장에서는 보통 황당한 일이 아니게 된다. 기껏 영양의 발자취를 따라 한참을 쫓아왔건만, 영양은 간 곳이 없음이다.
옛날, 시가작법에는 “영양이 뿔을 거는” 행위를 일러, 시인의 속내를 행과 행 사이, 즉 시인의 마음에 자란 높디 높은 나무 사이에 걸어두는 행위 즉, 공중지음(空中之音), 상중지색(相中之色), 수중지월(水中之月), 경중지상(鏡中之象)의 묘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시인이 속내를 드러냄이란 한낮에 겉옷을 벗어제치고 대로를 활보하는 일보다 창피한 일이므로, 무릇 고매한 작가 정신(시 정신)이란 “영양이 뿔을 걸”듯 무겁게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글이란 자고로, “젓가락으로 냄비뚜껑을 두드리듯 해서도 안되며”, 장날 꽹과리처럼 쟁쟁대서도 안되는 법. 이를테면 성동격서 즉, 이쪽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저쪽을 치는 비법과 같이 본질을 감추거나 비워둠으로서 본질을 더욱 강렬하게 드러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뿔을 건 영양의 흔들리는 몸뚱아리를 생각하며 나는 오정희의 소설을 읽는다.
일찌기, 문학 이론가인 메어리 엘만(Mary Ellmann)이 언급했던 바, 자신감, 이성, 단정적 태도, 견고함, 솔직성, 서사성 등과 같은 남성적 사실주의(masculine realism)의 규범을 탈피한, 여성작가만의 특별한 상상력과 알레고리의 세계 즉, “영양이 뿔을 걸”듯 징후적이고 우회적이며, 간접적이고 시적인 세계가 오정희라는 여성작가의 작품 속에 구현되어 있다. 오정희의 작품은 ‘감춤’이라는 방식을 통해, 행간 사이에 묻어둔 작가의 상상력과 내면을 더욱 유려하고 깊은 색감으로 드러낸다.
“말이 있는 것은 말 없는 일을 밝히기 위함이며, 말이 없는 것은 말이 있는 일을 밝히기 위함이다”라는 말이 있다. 오정희는 목청 높여 노래하지 않는 대신 우회하고, 지연시킴으로써 소설의 미학적 수위를 더욱 높이고, 수면 아래로 풍덩 가라앉을 듯 주제에 무게감을 더한다.
2. 물의 순정성으로 돌아가기
오정희의 소설이 그 섬뜩한 상상력과 문체의 아름다움으로 뭇사람들을 주눅들게 해온지도 어언 40여년을 넘어간다. 인간으로 치자면 불혹의 나이요, 찌를듯 솟은 산맥과 도리쳐 흐르는 강물이 4번 바뀔 시간이니, 유구한 세월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처녀작 <완구점 여인> 이후로, 40여 년이라는 도저한 시간 동안 ‘여성의 삶’에 대한 성찰을 멈추지 않았던 작가 오정희가, 자신이 경험한 미국 생활(교환교수로 재직하던 남편과 오정희는 미국에 단기 거주했었다)을 배경으로 하여 쓴 소설이 바로 <파로호>이다.
중년의 여주인공 ‘혜순’은 미국행에 오른다. 갑작스런 미국행의 원인이란 다름 아닌, 만년 평교사였던 소심한 남편의 실직과 “기회의 나라 미국에서 다시 시작” 하겠다는 남편 병언의 일방적 통고 때문. 그러나, 미국에서의 삶은 생각처럼 녹록치 않다. 생선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야간 대학에서 공부하는 남편과 갈수록 비뚤어지기만 하는 아이, 경제적 곤란으로 시작하게 된 파출부 생활, 빈민가의 방 두칸 짜리 아파트 생활이 주는 어려움보다, 혜순이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남편과 이민 사회가 드러내는 얄팍한 ‘허위의식’ 이다.
“주말이면 혜순의 아파트로 한국 사람들이 모여들”어 “잡채와 불고기와 된장 찌개와 김치와 소주”가 차려진 상 앞에서 “술판을 벌이”고, 시국과 조국애를 논하지만, 그들의 조국애란, “한 그릇의 곰탕에 소줏잔을 기울이며 눈시울을 적시는” 얄팍한 감상이나, “하회탈을 화면 가득 그려놓고 <한국인의 초상> <한국인의 미소>”라는 제목을 내건 거덜난 상상력에 지나지 않는다.
소심한 ‘실직교사’가 아닌, “귀찮은 놈은 다 쫓아내자”는 정부의 속셈 때문에 조국을 등지게 된 ‘해직교사’, ‘반체제 인사’, ‘정치적 망명객’을 자처하는 병언의 허위의식은 이민 사회를 좀먹는 계급, 계층 간의 불화와 반목과 증오가 판을 치는 세계와 야합하여 거대한 부조리를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정작, 혜순을 가장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고등학교 선생으로 손 끝에 물도 묻히지 않던 혜순으로 하여금, 양 팔 걷어부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도록 만든 생활고인가? 건조하고 성마른 삶 속에서 바닥을 드러내 버리고 만 인간적 자존심인가? 그도 아니라면, 한없이 낯설고 부조리한 세계와의 불화와 단절인가?
그것은 어쩌면, 조각난 파편들을 이어 붙인 커다란 거울 속의 비정상적 세계, 그 동강나고 일그러진 세계와 그 속에 고독하게 서있는 자신의 분열된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혜순에게 있어 세계란 깨어진 거울의 더미이자, 거울 조각에 찔려 피 흘리는 몸뚱이와 복구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들이다.
혜순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삶을 ‘견디기’ 위해 습관적으로 물을 마시다가, 고양이를 죽이고, 그럼에도 결코 ‘견딜 수 없었던’ 삶의 풍경인 미국을 떠나 홀홀단신 한국행을 결행한다.
물의 순정성, 정화작용을 혜순은 알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혜순은 물을 마시곤 했었다. 석회질이 많은 물을 병에 받아놓고 앙금을 가라앉혀 습관적 으로 마셔댔다. 물이 목까지 차올라 구역질이 날 지경이면 소금을 집어먹었다 ……유리병 속의 물을 다 비우고 나면 몸 속에서 투명한 물소리가 나는 듯 했다 ……끊임없이 물 마시고 소금을 집어먹어는 행위로 무엇으로부터 사면받기를 바랐던 것일까.(<파로호>, pp.335-336)
물이 무엇인가? 물이란 씻김과 싹튀움의 의미, 곧 생명과 재생의 알레고리에 다름 아닌 것. 혜순은 이 생명의 알레고리를 통해 정신과 육체를 좀 먹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씻어내고, 미국이라는 새 토양 위에 푸르른 새싹을 튀우려 노력하지만, 그것은 한갖 덧없는 꿈에 지나지 않음을 인식한다.
3. 나뭇가지에 내다 건 고양이를 보라.
한치의 희망도 걸어볼 수 없는 이 척박한 현실에 눈 뜨는 고통스러운 개안의 순간, 혜순은 고양이를 살해하게 되는바, 고양이라는 동물은 혜순의 마음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던 헛된 소망과 허위의식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것은 의식적이고 제의적이며, 상징적인 죽음의 알레고리이다. 이쯤 되면, 구약성서 창세기편의 저 유명한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하느님께서 소돔에 보내신 두 천사를 폭도들로부터 보호한 댓가로 멸망하는 소돔에서 구원받은 롯 일가와, 뒤를 돌아 본 댓가로 소금기둥으로 변하였더라는 불행한 롯의 아내의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약간 문학적 해석을 내려보자면, 그것은 단순히, 올페우스와 그의 아내 에우데리케의 이야기(죽은 아내 에우데리케를 되찾기 위해 명계로 내려간 음악의 신, 올페우스는 하아프 연주로 명계의 왕 하데스를 감동시켜 아내를 되찾게 되지만,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는 하데스의 명을 어기고 뒤를 돌아본 에우데리케가 파랑새가 되어 영영 날아가 버렸다는 이야기)의 히브리 버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오히려, 한 인간의 두 마음 즉, 롯이라는 한 인간 속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양면에 대한 알레고리에 가까울 터. 구원받은 롯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선한 마음이라면, 유황바다가 된 소돔을 돌아 본 죄로 소금 기둥으로 화한 롯의 아내란 악을 끊어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어두운 마음에 대한 알레고리일 것이다.
마치 롯의 이야기처럼, 혜순은 고양이를 죽임으로써 자신 속에 잠복한 또다른 ‘나’,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하여 얼굴을 처들 듯, 열망과 욕망과 허위의식 쪽으 로 빳빳이 고개를 처든 혜순과 병언과 미국이라는 땅덩어리가 내포하는 모든 의미들을 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양이를 죽임으로써 혜순의 반쪽이 기사회생하여 한국행을 감행하는 것이다.
더 이상 붉을 수도 푸를 수도 없이 퉁퉁하다거나 길다거나 형체를 말할 수 없이
해체되어 자루 속에서 악취가 풍기고 썪어가는 것은 고양이가 아니었다. 바로 자신의 내면에서 붕괴되고 부패해 가는 그 무엇이었다.(<파로호>, p. 369)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나, 물을 마시고 고양이를 살해하는 일 그 자체가 아니다.
부조리한 일상에 대한 혜순의 대응방식이다. 혜순은 결코, 현실에 대항하여 맞서지 않는다. 울거나 앙탈부리거나 다투지 않는다. 그녀는 단지, “세상에서 그네들의 가족만이 홀로 고립된 섬처럼 동그마니 떠 있는 듯” 고적한 밤, 아파트에 갇혀 “방문을 열고 우두커니 서서 아이들이 자는 모습”이나 바라 볼 뿐이다.
혜순의 견딤을 보라. 혜순은 결코, “값싼 위안에 자신을 팔지 말라”고 병언의 허위의식을 향해 소리치는 법이 없다. 그저, 일상을 미끄러져 가듯 관망할 뿐이다.
그리하여, 혜순의 물마시기와 고양이 살해는 하나의행위를 넘어 문학적 알레고리가 된다. 결국, 물 마시기와 고양이 살해는 <파로호>라는 소설의 거대한 행간 사이에 꼭꼭 숨겨둔 의미이자, 높디 높은 가지에 뿔을 건 영양이다.
4.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말처럼
<벽암록>에는 “뛰어난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린다”는 옛말이 있다. 뜻인 즉, 계교와 시비를 일시에 놓아버리고 망정과 견해가 사라지고 나면 깨달음이 온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오정희의 <파로호>는, 혜순의 물마시기와 고양이 죽이기를 통해 일체의 의미에 대한 부연을 거부한 채 하나의 의미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과히,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말의 경지에 이르렀다 보아도 될 법하다.
언뜻, 물마시기가 의미하는 신생(新生)과 고양이 죽이기가 의미하는 죽음 사이에는 현깃증을 일으킬 만치 아득한 거리감이 존재하는 듯 느껴진다. 그러나, 의미를 한 번만 뒤집어 보라. 물을 통해 얻지 못했던 신생(新生)을 혜순은 죽음(고양이 죽이기)을 통해 얻는다. 도무지 측정할 수 없는 죽음의 깊이 속에 숨긴 성찰과 관조의 경지가 아닌가.
대동강가 연광정(練光亭)에는 고금의 시인들이 지은 제영시(題詠詩)가 수 없이 많이 걸려있었는데,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모두 걷어치우고 정지상(鄭知常)의 <송인:送人> 한 작품만 남겨두었다는 고사가 아직도 전한다. (과연 그의 시에는 극치의 정운미(情韻味)가 넘쳐 중국의 사신도 그의 시를 대하여 신운(神韻)이라 극찬하였다 한다.) 그러나, 나는 오정희의 소설을 나의 서재 높이 걸어두고 글잡이로 삼으련다는 고백을 해야 할 수밖에 없으니, 진정으로 오정희의 소설이
홍운탁월(烘雲托月) 즉, 달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달을 더욱 희게 그리는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정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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