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남미를 풍미하던 사상 중 ‘종속이론’이란 것이 있었다. 세계 경제는 ‘중심국’과 ‘주변국’으로 나뉘어 있으며 ‘주변국’은 ‘중심국’에 착취당하고 그에 봉사하는 것이 주임무다. 그 때문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중심국’은 부유해지고 ‘주변국’은 피폐해진다는 것이 요지다.
이 이론은 70~80년대 한국에도 수입돼 소위 운동권과 학회에 단골 학습메뉴로 등장했다. 당시 한국에는 마치 초기 기독교도들이 박해를 피해가며 신성불가침의 진리를 전파하듯 열과 성을 다해 이 이론을 설파하던 대학생 지도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이 이론에 문제가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사실상 용도 폐기되게 만든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는 점은 역설적이다. 해방 이후 지난 50여년간 한국만큼 미국의 ‘주변국’이었던 나라는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상원조부터 차관까지 일본을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미국에 종속돼 있던 한국은 이 이론에 따르면 거지 나라가 돼 있어야 했다.
반면 세계에서 북한보다 ‘미 제국주의’와 맞서 싸우며 경제적 자주와 독립을 주장해 온 나라는 없다. 역시 이 이론에 따르면 북한이야말로 부강하며 모든 인민이 잘 사는 지상낙원이 돼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아무리 짙은 색안경을 쓰고 보려야 미국에 종속돼 있던 한국은 잘 살고 ‘주체’를 외쳤던 북한은 못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8차 회담을 거치며 장기간 진행돼 온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었다. 빠르면 이 달 중 타결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에 발맞춰 한총련, 전교조, 전공노(전국 공무원 노조) 등 숱한 단체들이 이를 깨기 위한 결사 항전을 준비 중이라 한다.
김정일의 충직한 하수인인 한총련과 친북 반미교육의 선봉에 선 전교조는 과거 ‘종속이론’을 신봉하던 이들의 전통을 계승한 단체들이다. 이들은 ‘종속이론’이 학문으로서의 타당성을 잃은 지 오래됐지만 한 번도 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과거를 반성한 적이 없다.
잘못을 깨닫고 시인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한 때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젊음을 바쳤던 것을 뒤집는 것은 더욱 그렇다. 그 동안 자신이 ‘참 바보처럼 살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보다는 폭력과 억지로 이성적인 토론을 덮으려는 유혹에 빠지기가 훨씬 쉽다.
자유무역이 양쪽 모두에게 득이 된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특히 한국 같이 미국이나 일본의 첨단 테크놀러지와 중국, 베트남 같은 후발주자들의 값싼 인건비 사이에 끼어 갈수록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는 나라에서는 시장의 규모를 넓힐 수 있는 자유 무역권의 확대가 절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발전을 가로막는 한총련과 전교조 같은 암적 수구단체는 말할 것도 없고 김근태, 정동영, 천정배 같은 소위 여권의 중심인물이란 사람들이 쌍수를 들고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반대하고 나서고 있다.
1992년 미 대선에서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이 때 제3당 후보로 나선 로스 페로는 이 협정이 체결되면 진공청소기에서 나는 “거대한 빠는 소리”(the giant sucking sound)와 함께 수많은 미국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민주당 일각에서는 극렬한 반대가 계속됐지만 클린턴 행정부는 결국 공화당의 협조 하에 의회의 승인을 얻어냈다.
클린턴 행정부 동안 미국이 사상 최저수준의 실업률, 최고의 경제 성장률 등 호시절을 누린 것이 자유무역의 확대와 무관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미국인들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을 목 놓아 외쳤던 페로만이 정치권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6.25의 잿더미에서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의 신화를 이뤄낸 한국은 지금 일류 국가로 진입하느냐 제2의 남미로 전락하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다.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지도자와 국민들이다.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과 국민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기를 기원한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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