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길을 잃고
길 위에서 길을 찾고
10일(토) EB 틸든 팍
틸든 팍(Tilden Regional Park). 한인들 사이에선 대강 버클리 틸든 팍이라 불린다. 말이 팍이지, 숫제 거대한 공원산(公園山) 혹은 산공원(山公園)이다. 거기에 살점을 맞댄 도시 또한 한둘이 아니다. 버클리 말고도 오클랜드, 오린다, 리치몬드, 산파블로, 엘소브란테 등.
오지랖이 넓은 만큼 그곳에 이르는 길 역시 세고 셌다. 누구에게는 그래서 훨 간편하고 누구에게는 그래서 더 헷갈린다. 적어도 탈, 없어도 탈, 경우에 따라 많아도 탈이다. 깨달음의 길 또한 그러하지 아니한가.
많아서 탈인 길의 조화는 틸든 팍에 들어선 뒤에도 이어진다. 지도에는, 꺾이는 마디마디 ‘왼쪽으로 혹은 약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혹은 약간 오른쪽으로’ ‘그냥 쭉 그대로’ 등 얼추 눈치만 있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게끔 표시가 돼 있다. 그렇게 꺾은 뒤 얼마만큼 더 가야하는지 거리까지 소숫점 이하 한자릿수 단위로 적혀 있다. 그러나 지도읽기에 서툴거나 쑥맥인 이들에겐 영 맹탕이다.
지도마저 챙기지 않은 이들의 갈팡질팡 우왕좌왕은 더말할 것도 없다.
굽이굽이 세워놓은 이정표들도 숲과의 조화를 고려했음인지 대개 낮고 튀지 않은데다 제법 치렁치렁해진 나뭇잎이나 숲그림자에 은근슬쩍 숨은 듯한 품세다. 갓 대패질을 해 세워놓았을 땐 나이테며 결이며 뽀얀 살갗 푸른 핏줄처럼 또렷하고 광택이 보통 아니었을 이정표 나무판은 어지간히 삭고 빗물까지 먹어 회색인지 갈색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거기에 쓰여진 흰 페인트 글씨는 더러 나무판을 닮아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더욱이
이정표를 살피는 것도 노상 ‘운전석에 앉아서 윗눈질’로 습이 든지라 깜박 놓치기 십상이다.
가도 가도 그 길 같고, 돌아도 돌아도 그 길 같다. 그 길 같음은 곧 그 길 같지 않음이다. 길 위에서 길을 잃고 길 위에서 길을 묻고 길 위에서 길을 찾고, 그러느라 여럿이 헤맸다. 10일(토) 오전 10시까지 틸든 팍 환경교육센터 주차장에 모였다가 함께 걷기로 한 2007년 첫 북가주 불자 연합산행은 그렇게 몇몇의 ‘길찾기 체험학습’ 때문에 늦어져 10시40분쯤 시작됐다.
햇볕이 좋았다. 저 아래 민동네라고 다르랴만 길 양 옆으로 늘어선 수풀에서 뿜어나오는 그 무엇들을 반찬삼아 쬐는 봄햇볕은 더 맛있었다. 바람도 좋았다. 손목발목까지 덮는 긴 옷에 갇혀 오래도록 햇볕구경 바람구경 못한 팔다리 솜털들이 실로 오랜만에 일제히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살랑살랑 봄바람에 간들간들 장단을 맞췄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작년 6월 첫 산행 때부터 단 한번도 빠지지 않은 SF 여래사 황기준 처사는 이번에도 몇몇 ‘오륙십대 젊은 법우들’과 함께 선봉에 섰다. 센터 주차장에서 서쪽으로 난 트레일을 따라 1마일쯤 걷자 오른쪽으로 나무들이 거의 종적을 감춘 풀무더기 언덕이 이어졌다. 진행방향 저 멀리로 SF베이 물이 푸릇푸릇 보였다. 아름드리 나무숲에서는 거의 눈에 띄지 않던 납작키 노란 야생화들은 봄햇볕을 받아 한결 샛노란
자태를 뽐냈다. 서른명쯤 되는 불자들은 너댓 무리로 나뉘어 혹은 홀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혹은 말없이 걸었다. 처음 모인 주차장 옆 풀밭으로 돌아오기까지 두시간쯤 걸었다. 전에는 힘들다고 칭얼대던 초등학교 이삼학년 둘이서 그 와중에도 힘이 남아돌아 뜀박질을하고 막가지 집어들어 거짓 칼싸움 놀이를 하면서 걸을 정도로 길은 편안했다.
그런 날 그런 곳 점심.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 없었다. 그 풀밭 대부분을 차지하고 즐거운 고함을 질러가며 술래잡기 비슷한 놀이에 여념이 없는 청년 남녀들을 보며 돈오 스님(오클랜드 보리사)이 말했다. 아 우리는 언제 저렇게 청소년들이… 그러고보니 이날 산행에 참가한 청소년 불자들이라야 같은 절 유태원 군과 초등학생 4명을 빼고는 없었다. 늘 그렇듯이 여준 스님(SF 불광사)은 좀체 말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어느 코스인지 약 30분동안 더 걷고왔다. 그 사이 형전 스님(보리사)은 반원을 그려 앉은 참가자들에게 5월12일로 예정된 부처님 오신날 연합법회에 대해 설명하고 많은 성원과 참가를 당부했다.
오후 2시쯤, 수원 스님(SF 여래사)이 왔다. 일(어느 불자 장례식)이 바빠 못오실 줄 알았는데 오신다며 불자들이 서둘러 일어나 합장을 했다. 스님도 합장한 채 허리를 굽혔다. 꾸러기 어린 불자들에게도 꼬박 경어를 쓰며 예를 갖추었다.
따로 법문은 없었다. 길이 많아서 길을 몰라서 헤맨 경험까지 포함하여 그 모든 것이 법문이었다. 산행의 맛? 구구한 설명이나 해설이 필요없다. 맛을 보면 맛을 안다. 깨달음의 맛도 그렇다던가?
다음달 산행은 4월14일(토)에 있다. 장소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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