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책과 돈의 접수를 맡은 유자경과 강선자가 말했다. 자경과 선자는 문예지를 만들 때도 실력있고 성실한 나의 든든한 후배들로 도서실 설립에도 전력을 다해 나를 도왔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서 책을 사오며 목록을 만들어 나아갔다. 책 대여 카드도 이 둘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고 따지고 보면 내가 한 일은 단상에 올라가 연설을 한 것에 불과했다. 훗날 둘다 대학생일 때 문단에 데뷔하여 문단에서는 나의 선배가 되었으나 나에 대한 예우는 변화가 없었다. 내가 학교를 일찍 입학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들보다 내가 어린 것을, 내가 문단에 나왔을 때 알게 되었는데도 깍듯이 고등학교의 선배대접을 했다. 이것을 타고난 나의 인복이라고 해야 할지, 제대로 된 인물을 볼 줄 아는 나의 안목 때문인지 나의 일생은 이렇게, 어디에서건 삶의 맛을 만끽하게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퇴학 직전까지 간 사건은 도서관을 개관하고 3주만의 일이었다. 변장을 하고 수미와 영화관을 드나든 건 꽤나 많았지만 결국 <애수>(Waterloo Bridge) 때 걸리고 말았다. 청주 장학관이 총출동한 자리에서 붙들린 것이다. 빵집은 물론이고 극장에서 교묘히 잘도 통과 되었는데, <애수>의 <비비안 리>에게 취해 있는 사이에 극장안에 불이 환하게 밝혀지면서 영화는 중단되었다. 그 자리에는 우리학교 훈육주임과 담임선생도 있었다. 훈육주임은 말할 때마다 입술 양끝으로 하얀 약 같은 것이 끼어나와 다이아찡이라는 별명을 가진 물리 선생이었다. 담임선생은 화학선생으로 개구리같이 튀어 나온 눈을 두리번거리며 하도 바닥을 봐서 동전한푼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마치 동전한푼이 떨어져 찾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두 별명뿐아니라 선생마다 별명이 있었는데 대부분 내가 붙여주었다. 이 두 선생은 자신들 별명의 작명자를 알고난 이후 나를 껄끄럽게 대하고 있던 중이었다.
“현장만 보지 못했지 너희 둘이 극장에 드나드는 것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번으로 너희는 끝이다.”
“빵집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강당의 피아노를 독점하고 조회시간에 단상에 올라 훈계했냐?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다이아찡 선생과 동전한푼 선생이 번갈아 한마디씩 했다.
“장학관 총출동이다. 너희는 내일이면 퇴학이다.”
“내일부터는 이 옷차림으로 마음놓고 활개쳐도 된다는 말이다.”
다이아찡과 동전한푼이란 별명에 분풀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두 선생은 오히려 통쾌해하는 것 같았다. 물리와 화학을 워낙에 싫어한데다 두 선생 모두 인상조차 못마땅해서 지은 별명의 댓가를 극장에서 받은 것이었다. 그것도 비비안리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해 있었던 순간에.
“영화가 학생들을 타락시킬수도 있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소설가가 될 저나 대 피아니스트가 될 수미의 경우는 오히려 공부가 됩니다. 그러니까 의식수준에 따라 벌을 줄 수 있으나 저희 둘은 해당이 안됩니다.”
나는 수미와 함께 아침 일찍 교장실에 가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명단을 보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너희둘이, 특히 혜성이, 너같은 모범생이 학교의 규칙을 어기다니 놀라울 뿐이다. 규칙은 규칙이다. 징계수위 결정만 남았을 뿐이다. 공부순위와 인기순위로 벌이 크니 너희는 퇴학을 면할 길이 없다.”
교장의 표정은 근엄했고 단호했다.
“교실마다 난로를 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수미나 가족과도 떨어져 학교에 도서관을 설립한 저의 공로는 참작하실 수 없나요?”
“그 점은 기억해 줄 것이다. 처벌은 별개의 문제다.”
“교장 선생님께서 장학관들을 설득하셔야 합니다. 저희들의 모든 공적과 학교내에서의 저희들의 생활 등을 논의하셔서 면죄해주셔야 합니다. 약속 드리겠습니다. 졸업 때까지 절대로 영화를 보지 않겠습니다.”
“내가 해볼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너희들이 서울의 어느 학교에 갈 수 있도록 힘이나 써 보겠다는 것이다. 더이상 할말이 없다.”
이 말과 함께 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교장실을 나갔다.
“수미야, 너, 수위실에 가서 망치 좀 가지고 도서관으로 와.”
울상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수미에게 이 말을 남기며 나도 교장실을 나왔다.
“망치는 왜?”
말 한마디 못하고 겁에 질려 있던 수미가 울먹이며 물었다.
“도서관을 쓰레기장으로 원상 복구해 놓고 서울로 가자.”
“도서관을?”
“내가 만든 거니까 내가 없앨 거야.”
수미는 부동의 자세로 떨기만 했다. 나는 수미를 남겨 놓은 채 수위실에 가서 망치를 들고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유리장도 깨고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찢어 나갔다.
“혜성아, 그만해. 교장 선생님께서 너를 찾으셔.”
얼마 후 수미가 달려와 나를 붙들었다.
“다이아찡 선생님과 동전한푼 선생님이 네가 도서관을 부수는 것을 보고 가셨는데 교장 선생님께 말씀 드렸나봐.”
나는 수미를 따라 다시 교장 앞에 섰다.
“네가…, 네가…”
교장은 나를 보자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