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기 조(시인ㆍ국제펜한국본부 명예회장)
흰 눈이 사락사락 내리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렸으나 눈은 오지 않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기가 점점 어렵다. 나는 어렸을 때, 교회에 잠깐 다녔다. 우리 집과 대문을 마주하고 사는 윤씨부인이 감리교회 집사였다. 주일만 되면 두꺼운 성경책과 찬송가를 들고 교회에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어느 해 겨울,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눈이 하이얗게 내린 길을 여러 사람이 밟으며 우리 집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는 윤씨부인 집 앞 대문에서 멎고 이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으로 이어지는 크리스마스송이 울려 퍼졌다.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윤씨부인은 대문을 열고 그들을 맞으며 성탄을 축하했고 성가대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윤씨부인의 말이 끝나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를 하고 다음 신도의 집으로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고 돌아갔다. 나는 그때, 그 노래의 감동으로 새벽잠을 설친 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겪은 교회에 관한 첫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해가 지나간 그 끝자리에 12월이 돌아왔다. 한 책상에서 공부하던 녀석이 교회 학생부에 다녔는데 성가대에서 노래할 앨토 한 사람을 뽑는다고 함께 가보자는 꼬임에 빠져 교회에 갔더니 간단한 테스트를 한 뒤, 합격되어 일주일에 세 번을 교회에 나가 크리스마스 행사에서 노래 부를 합창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성가대를 지휘하던 유 선생이 얼마나 열심이었던지 나는 그분에게 반했고 유 선생보다 더 열심히 합창연습을 했다. 그 해 크리스마스이브, 함박눈을 맞으면서 신도 집을 찾아가 성가를 부르던 생각이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다. 그야말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아기 예수 나셨도다.” 의 거룩한 노랫소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엄숙할 때나 조용할 때, 그리고 혼자서 생각에 잠길 때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뿌듯할 때는 귓가에서 맴돈다.
그런데 2006년의 크리스마스는 눈도 오지 않았다. 메마르고 뽀송뽀송한 크리스마스였다. 평화와 사랑이 깨진 크리스마스, 악의와 질투, 반목과 독선이 판치는 세상에서 혼자 밀려나 고립의 성을 쌓고 있을 때, 크리스마스는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바보처럼 아무 생각 없이 크리스마스를 맞으며 평화를 생각했고 사랑을 생각했다.
그리고 새해에는 평화와 사랑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기를 갈망하는 심정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샘솟듯 우러나기 시작했다. 의식이 사라지면 대상도 잠겨들게 되어 무의식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말, 그러니까 우주만유의 근원이 무의식의 자리이고 그 무의식의 자리가 나의 自性자성의 자리란 것을 깨달았다. 잠시 마음의 분별을 쉬고 나면 사람들이 가야할 큰 길이 보일 것이다. 바보처럼 생각 없는 것, 우주만유의 근원이 무의식의 자리라면 그 자리에 앉아 손에 잡힐 듯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새해는 황금돼지의 해라고 한다. 황금은 귀하고 중한 것이요, 돼지는 부를 상징한다. 두 가지가 겹쳤으니 많은 사람들이 황금돼지를 잡으려고 눈이 벌개 져 벌써부터 동서남북으로 질주하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목적한 황금돼지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눈이 벌겋게 불을 켠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들이 이 세상을 뛰어다니며 돼지몰이를 하는 동안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세상먼지를 마시고 시궁창같이 더러운 길을 걸어야 하고 쓰레기같이 너절한 말을 귀담아듣게 될 터이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제발 2007년에는 맑고 깨끗한 시냇물이 이 세상을 적시고 곱고 아름다운 꽃들이 땅 위에 가득한 세상, 입 밖으로 나오는 말마다 향기 나고 행동이 조신하여 인정이 살갑게 흐르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쓰레기 같은 빈껍데기는 가고 알차고 힘 있는 자, 거짓과 속임수가 없는 사람끼리 팔장끼고 살아가는 세상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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