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시집간 딸과 며느리가 예쁘게 포장한 선물을 보내곤 합니다. 그런데 몇 년간 어찌된 명분인지 보내진 선물이란 것이 스웨터가 아니면 오리털을 누빈 조끼였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애들아, 옷장 좀 봐라. 입지 않는 스웨터, 조끼가 넘쳐난다”했었지요. 그랬더니 금년에 딸아이는 영어로 된 ‘손자병법’이란 책을 보냈고, 며느리는 아무것도 안 보냈습니다. 어쩌면 현금을 보냈는데 집사람이 ‘삥땅’을 했는지도 모르죠.
그래도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변변한 선물이 없으니 섭섭해지더군요. 그래서 내 스스로 선물을 사기로 마음 먹고, 무엇을 살까 생각하다가 걷고 다니는데 편한 사스(SAS) 신발을 사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애난데일에 있는 한국인 상점에 가서 신을 신고 걸어보면서 “발바닥이 전부 닿는 것 같은데 정말 덜 피곤하고 편하냐?”고 묻자, “물론이지요. 그러니 식당 종업원, 간호사 등등이 즐겨 신지요.”라더라구요.
그날 저녁 저녁식사 테이블에서 집사람에게 사스 신발 산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더니 나를 쳐다보면서 한마디 하더라구요.
“여보, 내가 사스 신발 사주었을 때 신발 폭이 넓어 발이 신발 안에서 놀아나는 것 같아서 불편하다고 하더니, 생전 사스 신발 신어보지도 않은 사람처럼 이야기하네요” 하더라구요.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습니다. 나는 맹세코 사스 신발을 신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대꾸를 했죠.
“여보, 나는 사스 신발을 신어본 적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게 종업원에게 그렇게 물어본 것 아니겠어요. 아마 당신이 장인이나 아들을 사주고 착각한 것 같소.”
그랬더니 집사람 또 이렇게 대꾸하더군요.
“아, 이것 사람 잡네요. 내가 내 것과 당신 것 같이 산 걸 똑똑히 기억하는데, 아마 어느 신발장 구석에 처박혀 있겠지.”
그러면서 저녁 식사를 하다말고 신발장으로 가서 다 뒤져보더라구요. 그런데 내가 신어 본 적이 없으니 신발이 있을 리 있겠습니까?
어찌됐거나 그때부터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서로 비난 섞인 흉보기가 시작됐습니다.
“쳇, 커피 크림을 가지고 와 달라고 일주일을 앵무새처럼 이야기해도 계속 까먹었다고 하는 건망증 환자니까 사스 신발 사준 것 기억을 했을 리 없지…” “체, 하루에 한번쯤은 셀폰으로 전화를 걸어서 핸드백 주머니 자동차 안, 하다못해 화장실에서 벨 소리를 듣고 셀폰을 찾는 사람이 누구인데”
어제 저녁 가까운 지인(知人)들과 송년을 겸해서 저녁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어찌어찌 하다가 화제가 건망증이 됐고, 그래서 자연히 사스 신발에 얽힌 저와 집사람의 티격태격한 이야기를 했지요. 여기 세 사람의 논평을 알려 드립니다.
L씨 왈 “나는 이 선생을 가까이서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입니다. 이 선생은 결코 그렇게 까맣게 잊을 분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사스 신발이 처음일 것입니다. 아마도 부인께서 장인에게 사 드리거나 좌우간 어떤 착각일 것입니다.”
K씨 왈 “제가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기억력이란, 그 동기 또는 욕망에 비례한다고 합니다. 부인께서는 신을 사주겠다는 동기, 욕망이 있었고, 이 선생은 그저 사준 것을 받았을 뿐입니다. 분명히 부인이 기억에 대한 뚜렷한 이유가 있으므로 부인의 말이 맞을 것입니다.”
H씨 왈 “사주었는지, 아닌지 뭐 그리 중요합니까? 그 나이에 부인과 말싸움을 하셨다니 정신건강에 아주 좋습니다. 가끔 그렇게 싸우세요. 물론 끝에 가서는 조금 물러서는 모양새는 갖추고요.”
어찌 됐거나 나 아니면 집사람 건망증이 병이라고 할 만큼 된 것 아닌지 걱정입니다.
때르릉 전화가 울렸습니다.
“여보 난데 좀 적어요. 자꾸 잊어 먹었다고 그러지 말고. 집에 들어 올 때 커피 크림, 필터, 그리고 뭐더라 참 갤런짜리 물 2개, 그리고 내가 뭐가 필요하지…?” “여보, 나에게 부탁할 때 미리 좀 적어놓고 부탁해요. 그리 더듬거리지 말고…”
뭐야 이거 또 건망증 가지고 집사람과 말다툼 제 2라운드에 접어든 것 아닌가.
<이영묵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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