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제럴드 R. 포드 38대 미국 대통령이 93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포드 대통령은 닉슨 대통령이 도청 사건으로 유명한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사임한 다음 날인 지난 1974년 8월 9일 대통령 직을 승계하였습니다. 유일하게 투표를 통하지 않고 대통령이 된 포드는 탄핵 위기에 처한 닉슨 대통령을 사면 조치해 상처투성이의 미국을 치료했습니다. 이 후유증으로 포드 대통령은 1976년 민주당의 지미 카터 후보에게 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을 치유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지미 카터 39대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이 나라를 치유한 나의 전임자에게 진심으로 감사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네바다 주 오마하에서 태어나 레슬리 L 킹 주니어로 불리던 포드는 출생하자마자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외가인 미시간 주 그랜드 래피드에서 자랐습니다. 엄마가 페인트 판매원인 제럴드 포드와 재혼하자 양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포드는 미시건 대학의 유명 풋볼 선수가 됐고 프로 풋볼 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으나 예일 대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해군에 입대했습니다. 그 후 미시간에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25년간의 의회 활동을 했습니다.
1965년에 하원에서 야당이었던 공화당의 리더가 됐으나 당시 민주당 소속이던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해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포드를 “헬멧 쓰지 않고 뛰는 풋볼선수”라느니 ”융통성이 전혀 없는 바보천치“라고 조롱했습니다. 정치 활동에서도 그는 이처럼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의 가장 큰 상처는 짧은 2년 반 동안의 대통령 직에 있을 때 겪었습니다. 포드는 “더 이상 아픈 상처를 들출 수 없다”면서 닉슨 전 대통령을 용서했습니다. 포드 대통령의 인기는 급락하고, 경제도 나빠졌습니다. 캄보디아에 피랍된 미국 상선을 무력 구출했지만 헬리콥터 23대가 추락하고, 군인 41명이 작전 중 사망했습니다. 이 손실은 포드 또 큰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계속 상처투성이이었습니다.
그러나 포드 대통령의 위대함은 자신이 상처를 받아도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려는 순수함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야망이나 술수가 없는 정직함 자체였습니다. 그는 “나는 호화로운 링컨 자동차가 아니라 평범한 포드 자동차 일뿐입니다”(I am a Ford, not a Lincoln.)라면서 백악관에서 토스트를 손수 구워먹으며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포드와 58년을 함께 산 댄서 출신 부인 베티 포드 여사는 “나의 남편은 진심으로 하나님과 가족과 나라를 사랑했다”고 말했습니다. 포드 대통령은 ‘상처받은 치유자’였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봅시다. 오늘도 에셀 나무를 심으며…
글 : 호성기 필라 안디옥 교회 담임 목사
삽화 : 오지연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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