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주부)
타호 호수를 다녀왔다. 파랗게 눈이 스친 자리가 있던 나무들과 이틀을 보내고 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깃털처럼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눈을 치우는 차량들로 차가 밀리다 금새 길이 뚫리고, 스노우 체인을 장착하거나 검사하느라 차가 밀리고 다시 길이 뚫리곤 했다. 길이 막혀도 창 밖으로 금새 굵어져서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퍼붓는 함박눈을 보고 눈 속에 쭉쭉 뻗은 나무들을 보는 것이 좋았다. 길이 뚫리면 다음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산을 넘어 집으로 가는 내리막만 남은 어디쯤 옆으로 돌아가는 길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자 눈세상이 온통 내게로 다가왔다. 아름다운 만큼 시리도록 차가워서 세상살이와 닮았다.
눈은 내리고 내려서 온 땅을 고르게 덮는다. 울타리나 철망도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감싼다. 눈은 패인 길을 메우고, 여름이 남긴 빈 자리를 채운다. 그렇게 눈이라도 와야 시린 겨울에 마음이 따듯하다.
나는 삼십 년쯤 전, 외가 벽에 걸린 달력의 그림 속에 있는 것 같았다. 한 면에 두 달이 있는 달력에는 날짜 표시가 된 위로 눈 내린 겨울 숲이 있었다. 달력에 있던 것은 어느 먼 곳의 숲을 찍은 사진이었는지, 외가 주변의 나무들은 구불구불 잔가지가 앙상하게 삐죽삐죽하고 남은 잎도 하나 없었다. 숲이랄 것도 없는 산마루의 메마른 발치에는 노랗게 마른 풀들이 머리와 목을 내밀고 세상 구경을 하고 있었다. 풀의 노란색은 일부러 흑백화면에 집어넣은 색깔처럼 도드라졌다. 앙상한 모든 것에 이불을 덮어주려고 그랬는지, 눈만 푸지게 내리던 겨울이었다.
외가의 부엌에는 불을 때는 아궁이와 부뚜막에 아예 붙어 앉은 가마솥이 있었다. 아궁이로 나뭇가지들을 집어넣어 불을 일으킬 때는 온 부엌이 연기로 가득 차고, 부엌문을 열지도 않은 채 눈물을 참았을 외할머니는 가마솥에 밥을 지으면서, 그 밥 위에 달걀찜이나 생선찜을 앉히셨다. 엉덩이가 탈 것처럼 뜨겁던 아랫목으로 몰린 나는 요를 깔고 그 위에 다시 이불을 깔고 외할아버지의 등과 벽 사이에 끼어 앉아 내 머리만한 사과를 먹었다.
집은 흙마감에 벽지를 발라서 벽이 두꺼운 농촌의 기와집이었다. 손으로 치거나 몸이 부딪히면 벽지 안으로 흙이 부스럭거리면서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도 있었다. 대청 마루도 툇마루도 시간으로 단단해진 굵은 나무가 흙갈색으로 널직널직하게 앉았는데, 나무 마루는 순전히 걸레질로만 표면이 매끄러워져서 윤은 나지 않으면서 손바닥으로 쓸어보면 반들반들했다.
얼어붙은 논바닥에서 스케이트를 지치는 막내 외삼촌은 번개처럼 밥을 먹고 바람처럼 사라지곤 했다. 공부 안하는 아들을 탓하는 외할아버지의 야단과 한탄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따라 잡을 수 없는 속도와 거리였다. 목과 양팔을 움직이기가 불편할 만큼 모자가 달린 외투를 꽁꽁 여미고 이모를 따라가던 마실 나들이로 윗마을 아랫마을 구경을 했다. 라면 상자를 타고 눈이 없을 때 날듯이 내려오던 묘지 옆 비탈도 눈이 오면 춥고 너무 빨리 비탈을 내려올 것이 무서워 갈 수가 없었다.
이제는 내 어릴 적 모습이 하나도 없고, 찾아 뵐 어른도 더 이상 계시지 않는다. 찾아가도 사라지고 없는 동네가 그립다. 타호에서 보는 나무들과 눈이 오히려 더 외가의 겨울을 닮았다. 내가 그리운 것은 장소가 아니라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눈이 내리는 숲 속에 서 눈을 감으면, 바다를 건너지 않아도 외가 뒷마당이 내려다 보이는 뒷산 어디쯤 서 있는 것 같다. 보고 싶고,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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